변산반도 수성당





수성당 앞 바다


변산반도 채석강을 본 후에 일몰을 보기 위하여 수성당과 적벽강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채석강은 워낙 유명한 장소이다 보니 사전 지식이 있던 곳이었지만, 수성당은 어떠한 곳인지 모르고 해지는 바다의 풍경을 보기 위하여 갔던 곳이다.



수성당에 도착하니 여행지 분위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느 무속인이 제사를 지내고 있어, 그제서야 왜 '당'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수성당은 '신당'으로 오래된 건축물로서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수성당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신당 인근 주민들이나 어부들은 해신과 그의 딸 8자매신을 정성껏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정초에 격포(格浦)마을에서는 삼색 실과와 술·과일·포(脯) 등을 차리고 궂은 일이 없고 생기복덕한 제주(祭主)를 뽑아 정성껏 제사지낸다. 제일(祭日)은 정월 초사흗날인데, 근동 어민들이 모두 모여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린다. 당 안에 무신도(巫神圖)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불타 없어졌다. 



상량(上樑)에 ‘崇禎紀元後四甲子朝鮮純祖四年, 1804 六月’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50년(철종 원년) 이전부터 신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1864년(고종 원년)에 3차로 중수한 것으로 보이며, 1940년에 4차로 중수하였다. 옛 원형은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의 신당은 1973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 수성당 주변은 성스러운 곳으로 함부로 접근이 금지되었으며, 절벽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하다. 1960년대 초까지 수성할머니의 영정이 있었는데, 외부인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수성당 올라가는 길


수성당 옆 절벽


일몰을 보기 위해 수성당을 향하였지만, 미세먼지가 가득한 바다에서는 일몰을 볼 수가 없었다. 수성당의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멋졌으나 여행지라기에는 좀 거리가 있다.


해 지던 서해바다




부안 수성당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적벽강길 54 

전화번호 : 063-580-4713








느리게 보여도 절망하지 말라


성공회의 예수상


"내가 계획한 일들은 바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전이 실현되는 시간은 천천히, 꾸준히, 확실하게 다가온다. 

 느리게 보여도 절망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이 확실하게 이루어 질 것이다.

 인내하라!

 단 하루도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합 2:3,LB)


태어나고, 아이답게 즐기고, 학교에 들어가고,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가지고, 성장할 곳이 없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테두리에 갇혀 살아가고 있을까.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테두리 속에 또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을까.

모두 같은 틀에 갇혀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길과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꿈꾸는 그 열정의 순간에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열정이 타고 타다 점점 희망의 땔감이 모자라질 때에, 다시 일상의 테두리로 돌아간다.

그후 테두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마치 어두운 밤, 길을 모르는 산 속에서 마을을 찾기위해 방황하지만, 

계속 같은 곳을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과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마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있다. 

아직 자신도 모르는 땔감은 남아 있다. 아직 우리는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은 지구의 작은 산이 아니라 태양일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뜨거운 존재일 것이다.

인내하자!

계획한 일들이 비록 일어나지 않을 지라도.

자신의 삶을 천천히, 꾸준히, 확실히 만들어간다면, 느림과 정체는 문제되지 않으리라.

오늘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은 비록 어제 걸었던 길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고무나무에 매달린 물방울


나의 집 정원, 고무나무에 매달린 빗방울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아침을 느끼고 싶기에는 저 빗소리가 너무 기쁘다.

귓가에 소근 소근 마음을 가라앉게 해준다. 

왜 이렇게 비만 오면, 이불 속은 따뜻한 것인지...

훌쩍 털어버리고 싶지만 늘 부지런함과의 싸움에선 지는 쪽인가 보다.

하루를 돌이켜 보며, 그 싸움에서 이긴적은 몇 번 있을까?

공부와 놀이, 잠과 깸, 휴식과 일, 만남과 고독 이런 것들의 연속에서

하루를 보내며, 또 내일을 기약하고 또 다음을 바라며, 순간을 안주한다.

잠시 마음을 놓고 살면, 인생에 주어진 목적이 멀어진다.

그걸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래서 더욱 무언가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데,

내일 세상을 떠나도 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세상을 보내고 돌아왔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하는데,

과연 될까?

갑자기 번잡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고마운 빗소리가 고민의 빗소리로 바뀌었다.

아마도 하루이니, 기약이니, 이런 저런 물음 들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함정인가 보다.

오늘도 비는 늘 내리던 것처럼 변함없이 내릴 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자신'이라는 것 하나가 남게 되는 것 같다.

별것도 아닌 것에 고민하고 기뻐하는 인생에 후회는 없다. 

단지 그런 고민에 기쁨을 잃음에 반성할 뿐이다. 

아쉬운 것 또 반성하고 미래의 길을 위해 노력을 해보아야 겠다.

저 빗방울도 다시 대지로 바다로 하늘로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비에 그만 취하고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 보자.

다시 비가 오는 아침에 빗소리에 기뻐하는 날을 기다려보자.








변산반도 채석강





변산반도 채석강


변산반도 여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른 장소가 채석강일 것이다. 해안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절벽에 기괴하게 모인 퇴적암이 풍경을 압도하는 곳이다. 내게도 변산반도의 여행은 채석강이란 곳을 보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서해 바다와 퇴적암층


채석강은 강이 아니라 썰물 때 드러나는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200m)일대의 층암 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기암괴석들과 수천수만권의 책을 차곡차곡 포개 놓은 듯한 퇴적암층 단애로, 강자가 붙어 강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중국의 채석강(彩石江)과 그 모습이 흡사해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닭이봉 한자락이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깎이면서 형성된 퇴적암층이 절경이다. 이곳의 지질은 선캠브리아대 화강암, 편마암이 기저층을 이루고 있고, 중생대 백악기(약 7천만년 전)에 퇴적한 퇴적암의 성층으로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와층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만권의 책이 쌓인 듯한 채석강


위에서 말했듯이 채석강의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시선 이태백이 달빛 아름다운 밤, 뱃놀이를 하며 술을 즐기다 강물에 비추어진 달을 잡으러 푸른 물에 뛰어들어 그 삶을 마감하였다는 장소에서 기인하는 이름이다. 중국의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소인지 모르지만 격포해수욕장 인근 닭이봉의 한쪽을 장식하는 채석강의 모습은 수많은 책이 높다랗게 쌓여 있는 듯한 특이한 퇴적암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격포항 방면으로 자리하는 해식동굴은 그 안쪽에서 바다와 기암, 하늘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다. 채석강 탐방은 물때를 확인하고 찾아야 멋진 경관을 자세히 즐길 수 있다. 만조 시기의 채석강은 단순한 해안의 부드러운 모습뿐이다.


해가 지던 채석강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11월 17일 명승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12만 7372㎡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다. 옛 수군(水軍)의 근거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이 있던 곳이다.


부안 채석강


지형은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주변의 백사장, 맑은 물과 어울려 풍치가 더할 나위 없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퇴적암층


채석강은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지면 들어갈 수 있는데, 간조 때는 물 빠진 퇴적암층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다생물과 해식동굴의 신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간조 때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노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바다와 바위


퇴적암이 빚어내는 절경은 부산 태종대와 해남 우항리 등 우리나라 해안 여러 곳에 존재하지만 이 곳 해안의 채석강은 이름 만큼이나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수천만년 동안 바닷물에 깎이고 남은 바위절벽 면을 이루고 있는 자갈, 모래 등의 켜(층리)가 수평으로 길게 이어지지 않아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채석강의 절벽과 해수면 부근은 검은색의 이암과 실트암으로 이루어져 얇은 책을 연상케 하는 반면, 위는 층리가 다소 두껍게 나타나는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얇은 역암층이 관찰된다. 반면 퇴적암 구조상 채석강의 아래층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봉화봉 남쪽은 큰 바위들이 끼어있는 역암층이 두껍게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래로 갈수록 입자가 크고 위로 갈수록 입자가 작아지는 것이다. 이런 퇴적구조로 볼 때 입자가 크고 불규칙한 역암층이 쌓인 환경은 수심이 깊고 경사가 급한 호수 속이었으며, 층의 두께로 볼 때 그 시기는 비교적 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입자가 고운 이암과 실트암이 쌓일때는 비교적 평온한 수중삼각주 평원이었으며, 이런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았을 것이라는 게 전승수 교수(전남대 지질학)의 분석이다.



한편 격포항 방파제에는 채석강 절벽의 사암 사이에 모난 돌로 이뤄진 역암층이 끼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다른 퇴적암 절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는 입체적인 구조로 봐 호수 속 급경사면에 불안정하게 쌓여있던 자갈이나 바위들이 물 속에서 사태를 일으켜 모래가 쌓여있던 더 깊은 호수 속으로 이동해 왔거나 경사가 급한 호수 속의 작은 물길을 따라 실려내려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거북이를 닮았던 바위


신기했던 바닥



해지던 바다





부안 채석강 (변산반도)


전화번호 : 063-582-7808

주소 :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301-1

홈페이지 : http://www.ibuan.co.kr/tour01/index.htm







군산 복성루




복성루 물짜장


변산반도에서 새만금을 지나 군산으로 넘어왔다. 전국 3대 짬뽕집 중 하나라는 복성루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전에 군산에 들렸을 때에 복성루를 찾아왔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대기하는 줄이 너무 어마어마했다. 몇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줄이기에 과감히 포기했었다. 그래서 군산에서 유명한 다른 중화요리집인 지린성을 갔는데 그곳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다른 것을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평일에 오픈시간에 맞추어 복성루에 들리니 기다리는 것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먹고 나올 때에는 다시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오픈시간에 맞춰 간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복성루의 실내는 작고 아담한데, 공간활용을 최대한 하여 손님이 꽉차게 들어갈 수 있다. 주문은 물짜장과 짬뽕으로 했다. 공주의 동해원, 강릉의 교동짬뽕과 함께 3대 짬뽕이라는 곳을 드디어 맛 볼 수 있었다. 물짜장은 팔보채에 면을 넣은 맛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흰짜장을 연상시키지만 느끼한 맛이 덜하고, 팔보채보다는 절 끈쩍거린다. 어떤 사람들은 복성루에 짬뽕보다 물짜장이 더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짬뽕은 적당히 매콤하며 약간의 탄맛에 고기 육수로 담백하다. 복성루 짬뽕은 그냥 그렇다는 말이 많던데, 내게는 맛있는 짬뽕이었다. 물론 나도 몇 시간을 기다려서 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반대적인 불이익이 없다면 충분히 맛있는 짬뽕이고, 또 먹어보고 싶은 짬뽕이다. 이외에도 잡채밥도 꽤나 유행을 하는 것이니 인원이 더 같다면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담한 중국집




물짜장 : 10.0원 / 짬뽕 9.0원



물짜장






짬뽕





복성루


전화번호 : 063-445-8412

주소 : 전북 군산시 월명로 382 (미원동 332) 

영업시간 : 매일 10:00 - 16:00, 일요일 휴무













군산 영국빵집




영국빵집


전에 군산에 와서 전국 3대 빵집이라는 이성당을 들려 돌아갔는데, 이번에 군산에 들렸을 때에는 군산의 또다른 유명한 빵집인 영국빵집을 찾았다. 이성당처럼 길게 늘어선 사람은 없지만 분위기도 그렇고 빵의 종류도 그렇고 옛 모습을 가지고 있는 진짜 빵집의 모습이었다. 빵의 종류도 단팥빵, 슈크림빵, 꽈배기, 코로케, 만쥬, 마늘빵 등 친숙한 빵들로 가득하다. 왠지 모르게 우유 한 잔과 함께 빵을 먹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려 진다. 영국빵집에 들어가니 평일이라 그런건지 한산하고 조용하다, 빵을 굽고 있는 냄새가 기분좋게 퍼져있다. 단팥빵과 만쥬 등 몇가지의 빵을 골라 계산대로 가니 갓구운 마늘빵이 나온다. 사장님께서 구수한 미소를 지으시며 하나 먹어보라고 건넨다. 아저씨는 빵을 건넸지만, 내게 다가온 것은 사람의 情이었다. 빵집의 이름은 영국빵집이지만, 전형적인 추억과 정이 넘치는 '한국빵집'이었다. ^^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한국프로제빵왕


특허받은 빵집


특허받은 찰보리마루만쥬


영국빵집 보리만쥬


단팥빵



추억의 빵으로 가득한 빵집





영국빵집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대학로 144-1 (신풍동 1001-11)

전화번호 : 063-466-3477 

영업시간 : 매일 08:00 - 10:00연중무휴


가격대

흰찰쌀보리 만주 12개 세트 : 10,000원

흰찰쌀보리 단팥빵 : 1,300원

흰찰쌀보리 카스테라 : 5,000원

흰찰쌀보리 초코파이 : 2,000원






 

부안영상테마파크




부안영상테마파크 입구


변산반도로 여행을와 부안 내소사를 들린 후 좀더 서쪽으로 향해 부안영상테마파크에 들렸다. 부안영상테마파크 주변에 몇몇 곳이 공사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지 않고 있었다. 


광화문 모양의 부안영상테마파크 입구


부안영상테마파크는 민속촌 개념과 촬영세트장 개념을 접목한 테마공원이다. 전라북도와 부안군, KBS 아트비전이 출자하여 2005년 7월에 완공하였다. 14만 8,400m²의 공간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양반가·서원·도요촌·한방촌·저자거리·방목장 등이 재현되었다. 영화 <왕의 남자> <음란서생> <광해> <사도> <관상> 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이산>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몇 해 전부터 역사극이나 영화를 촬영하는 세트 시설이 지방의 주요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다. 화려한 화면 속의 모습을 기대하고 찾은 관람객들은 촬영을 위한 필요 부분만을 강조하여 만드는 촬영 세트의 특징과 생각보다 조악한 시설이나 인적이 드문 황량함으로 실망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또한 비슷한 느낌이다.


돈화문


이곳의 규모는 대단하지만, 본디 고궁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같은 드라마 세트장인 문경 사극 드라마 세트장이 좀더 느낌이 좋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요 전각들이 복원된 왕궁 시설을 중심으로 양반가와 서원, 일반 백성의 가옥과 장터, 성터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를 따라 자리하는 모습인데, 서울의 고궁을 모두 둘려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창덕궁의 부용지를 만들어 놓은 곳



단지 하나의 장점이 있다면, 진짜 궁궐은 실내를 들어가 볼 수 없지만, 테마파크는 근정전 안을 들어가 왕의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근정전


임금의 자리에서



궁궐 테마





양반집 테마




초가마을 테마






부안영상테마파크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로 309-64 (변산면 격포리 375)

전화번호 : 063-581-0975

홈페이지 : buanpark.kr/








곰소염전





곰소염전



부안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며 곰소염전을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 곰소염전을 들릴 계획은 없었는데, 곰소염전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카페에 들렸다가 잠시 곰소염전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곰소염전의 체엄 및 구경에 대한 플래카드가 있었지만 3월 중에는 쉬고 있는지 인적이 없고, 염전터에는 바닷물도 천일염도 없었다. 반들 반들한 바닦만이 이곳이 염전이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일염전이 몇곳이 있다. 염전이 서해안에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리 때만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 넓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갯벌이라 해서 모두 염전을 하기에 유리한 것은 아니고, 뻘과 모래가 반반씩 섞인 혼합 갯벌이 가장 유리하다. 펄만으로 이루어진 펄 갯벌은 발이 너무 빠져서 작업이 어려우며 모래 갯벌은 바닷물이 스며들어 바닷물을 가두기가 힘들다.



음식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소금은 바닷물을 전기분해해 생산하는 기계염과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들여 수분을 증발시켜 생산하는 천일염도 구분할 수 있다. 갯벌이 넓은 서해안에서는 연료를 절약하고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 즉 갯벌의 염전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농축시킨 후에 그 물을 가마솥에 끓이는 방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제염은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였고 1980년대까지도 국가의 중요한 산업이었지만 노동집약적인 산업인 관계로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사양화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이곳 곰소염전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천일염지인 이곳은 바다와 인접한 다른 염전과 달리 곰소만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줄포만에서 곰소만까지 화염(바다물을 끓여 만든 소금)을 만들어 남포리에 있는 사창에 보관하였다가 건모포(구진)에서 쌀과 함께 노량진으로 보내졌다.



지금의 곰소염전은 일제말기에 만들어졌으며, 해방 이후 천해조건의 자연의방법으로 곰소염전의 천일염을 생산하였으며, 처음엔 토판에서 옹기판으로 현재는 타일판으로 생산하고 있다. 촘촘한 바둑판 모양으로 개펄을 다져서 만든 염전에서 소금은 보통 3월 말에서 10월까지 생산되는데 5, 6월에 소금 생산량이 가장 많고 맛도 좋기 때문에 이 시기가 염부들에게는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곰소만의 입지 조건상 바닷물에 미네랄이 많기 때문에 소금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다른 곳에 비해 약 10배가량의 미네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곰소염전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곰소리 1






부안 카페, 부안 찐빵

슬지제빵소




슬지제빵소


부안 내소사에 들렸다가 잠시 쉬기위하여 곰소항 근처의 카페 슬지제빵소에 들렸다. 부안 주변 카페를 검색하면 나오는 곳이 별로 없어, 여행으로 변산반도를 찾아온다면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슬지제빵소를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지제빵소는 베이커리를 만든 곳은 아니고 찐빵을 판매하고 있는 곳이다. 분위기 좋은 인테리어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팟이 있어, 인기를 끌기에 충분하다. 적당한 커피 맛에, 개성있는 찐빵과 생크림찐빵을 맛 볼 수 있다. 찐빵은 팥의 단맛을 즐기는 사람은 맛이 덜하겠지만, 달지 않은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알맞을 맛이다. 슬지제빵소 바로 맞은 편에는 곰소염전이 있어, 음료를 즐긴 후에 잠시 곰소염전을 즐길 수 있다. 



슬지제빵소





커피 & 찐빵



OPEN : AM 10:00 ~ PM 20:00

MENU : 아메리카노 4.0, 라떼 5.0, 아인슈페너 6.0 / 찐빵 2.0, 생크림찐빵 3.5 / 오색찐빵 5.0 / 슬지네 SET 4.5 등


슬지네제빵소 영업시간


슬지네제빵소 메뉴


슬지네제빵 1대 대표


찐빵 기다리는 중


같이 기다리는 중


찐빵 나오고 있는 중


찐빵 나왔어요 ^^


주문한 찐빵, 크림찐빵, 아인슈페너, 아이스라떼~~


아이스 아인슈페너~


찐빵


생크림찐빵


생크림 꽉 찬~ ^^


슬지제빵소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곰소염전




슬지제빵소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청자로 1076 슬지제빵소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1219-73)

전화번호 : 010-3252-0059

홈페이지 : www.zzinbbang.kr/






하늘 아래



공 하나 던저보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잡념 하나 던져놓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복잡해져 누워 하늘을 보니, 

정답은 바로 저 하늘위에 있었다.


모든 혼동의 시작은 바로 저 하늘,

모든 혼동의 끝은 바로 저 하늘!





바라기, 바라기



해가 뜬 대낮에 해바라기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해를 바라보는 것이 해바라기가 아니었나?

해바라기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하여 서있게 되었다.

해바라기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의 발걸음을 들어, 나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보고 있다.

해바라기는 누구에게나 바라보게 해줄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잊고 있던 소중한 존재가 나를 바라보고 있겠지...

아직 세상은 혼자가 아니니 말이다.





마시러 잠자리



여름 동안 열심히 자라려고 노력한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이상하게도 많이 온 비 때문인지 잘익지가 않았다.

열매를 따지 않고 그냥 두니, 여름에는 아침 일찍 한 쌍의 새 부부가 무화과를 먹고 가더니,

가을이 오니 남아 있는 무화과를 나비와 벌들이 모여 먹고 있다.


날씨가 조금은 쌀쌀해지니 마을에 잠자리도 부쩍 늘었다.

어려서는 잠자리만 보면 잡아보고 싶어서, 

날개짓에 지쳐 잠시 쉬려 앉아 있는 잠자리를 부단히도 괴롭혔던 것 같다.

힘들게 잡아 얇은 날개를 두 손가락으로 잡고 있다보면, 

날개가 부러지거나 다쳐서 왜 잡았을까 하는 미안함에 당황하던 그때에는 

잠자리 한 마리를 보면서도 소중한 생명체의 비상에 감동하던 순수함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잠자리를 보면서도 '가을이 왔구나'라는 단순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쉽게 지나쳐간다. 

이제는 정말 세상의 아름다움도 즐길줄 모르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버렸나보다.


그리고 어느 날은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작은 정원에 과꽃이 피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그저 녹색 줄기만 있어서 뽑아 버릴까 했지만, 

잡초 같이 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두웠는데, 꽃 몽우리가 생기더니 예쁜 꽃이 나왔다.

국화가 피기 전에 작은 정원을 먼저 차지하고 앉아 자체를 뽐내는 것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밤새 비가 조금 왔던 모양인지,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오늘은 화분과 정원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하며 과꽃을 보니,

나보다 먼저 일어난 잠자리 한 마리가 과꽃에 맺힌 빗물을 마시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리 무심히 지나치던 잠자리가 꽃에 앉아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 잠자리만큼은 특별하게 느끼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과 생각에서 벗어나 아무 이유도 없이 행복감을 찾아준 잠자리에게 감사했다.


그러고는 '아차! 잠자리가 날아가기 전에 사진을 찍어두자'라는 생각으로 

사진기를 가지고 나와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잠자리는 날아가 버리고,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며, 

사진을 찍으려 부리나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자신을 생각하니 

이런 저런 고상한 생각들은 잠시였고 

다시 금세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갔다는 부끄러움에 볼이 빨개졌다.


그렇게 잠자리님의 강림 덕분에 추억의 사진 한 장이 곁에 있게 되었다.




사라진 들꽃, 野花





잎이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 들꽃...

그러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 해가 지나고, 다시 봄은 왔지만, 넌 자취를 감추웠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존재만이 사는 공간이 있다면,

내가 널 그곳에 보내지 않으리라.




Wild Flower





공공디자인 산책




도시의 환경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져, 요즘 공공디자인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다. 공공디자인 관련 책으로 이번 책이 3번째 책이다.

책의 내용에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기초적인 정보가 많이 있다. 거리를 예쁘게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 마인드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잊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이미지는 소화전의 색을 다양하게 하는 단순한 것으로 부터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산책을 보면, 난개발과 이익 창출을 위한 개발로 우리 도시가 얼마나 많은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냥 산다는 것이 아닌, 삶 가치를 올리고, 그로 인하여 인간의 심성을 바꾸고 안전한 도시로 연결되는 다양한 디자인의 힘을 볼 수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 ‘도시’란 인간이 스스로 창조해 낸 가장 큰 작품이요 가장 복잡한 발명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이 설계한 이 거대한 조직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 ‘사회문제’의 많은 부분이 현대 ‘도시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 보아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문제’의 많은 부분이 현대 ‘도시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인구의 도시집중과 과밀화에 따른 주거문제, 환경문제, 교통문제, 교육문제, 나아가 인간소외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되는 것이 도시의 자연화와 도시의 인간화이다. 그것은 이 시대의 화두이자, 예술도시를 꿈꾸는 자들이 생각하는 현대도시의 유토피안 이미지이다.




책에서 나눈 단락 만으로도 충분히 바뀌어야하는 이미지를 배울 수 있다.


도시 밤 밝히는 빛의 다리, 색의 다리 


도시의 화폭이 된 공사 가림벽 활용


작은 차이가 세련된 도시를 만든다


꽃 배합, 화분대 설치에도 예술적 감각이 필요


소유하는 땅, 공유하는 길로 함께하는 도시 만들기


깨끗한 바닥이 도시의 기본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미화원 복장


느리게 달리는 차, 음미하며 걷는 길


바라보는 미술, 접촉하는 공공미술을 활용 체험하는 예술 도시 이루기


도시 무대에서 펼쳐지는 물의 예술


거리의 예술공연, 사람이 디자인이다!


카페 같은 지하철 승강장, 어떻습니까?


보행을 안전하게, 시선을 즐겁게


가로수 보호가 도시환경 보호


차단 시설물에서도 예술적 감흥을...


문화재 안내판, 문화적 역량이 보인다.


상징물 통해 도시 이미지 각인시켜야


지역 특성 살리고, 주민을 섬기는 동 주민센터


가깝고도 먼 이웃, 파출소의 디자인 변화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택시 디자인 완성


우체국 심볼을 통한 문화읽기


시선을 끄는 지하철 사인 만들기


자동차 생산량에 걸맞는 번호판 디자인 수준 올리기


도시의 밤, 조명으로 예술의 밤 만들기


소화전의 색, 정답이 없다.


도로, 보도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선진도시


섬뜩한 현수막, 낯 뜨거운 광고물, 이제 그만!


거리 속 광고, 정보의 정글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자동차 중심의 선을 인간 중심의 선으로...


빨리 인식되게 하는 긴급차량 디자인


더불어 사는 세상, 장애인 아이 등 만인을 위한 디자인


시민 모두를 위한 공중화장실


공중전화는 죽지 않는다. 다만 달라질 뿐이다.


보기 좋은 벤치가 앉기도 좋다.


관리에 편하고 보기도 좋은 편한 휴지통




우리 도시도 관공서의 주민 친화적인 디자인, 편리하고 안전한 버스 정류장, 보행자를 안전하게 만드는 거리 등 윤택한 삶으로 다가가는 환경디자인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다.






유럽의 도시, 공공디자인을 입다




산이 깎이고 논과 밭이 사라지며 개발이 된다. 도로가 들어오고 네모난 곳에 아파트가 들어선다. 그리고 원룸과 상가가 생긴다. 순식간이다. 사람들은 투자를 하기위해 자본력 있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구입을 하고 가격을 부풀린 후에 팔아버린다. 모든게 이익과 관련되어 도시가 만드어 진다. 원룸이 모인 신도시에는 인도가 없다. 거리는 주차된 차들로 가득하고 가로수는 없다. 도시는 편리하나 답답하고 획일적이다. 아파트 빌딩 원룸 상가... 결국 이러한 반복으로 도심은 채워지고 모든 도시는 같은 모습이 되어버릴 것 같다. 그나마 좀 고무적인 것은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물 제한 및 공원 설치, 미관 개선에 대한 관점이 변하는 시기라 바뀐 세상을 기다려 본다. 정부와 지자체의 공공디자인과, 도시재생과, 건축과와 예산을 담당하는 국회시도의원들이 읽어보면 참 좋을 것 같다. 보도와 가로수, 자전거 재생, 공장의 변화, 직선과 곡선의 만남, 소비자 위주의 디자인, 쓰레기통의 변신 등 가치 있는 생활로의 변신을 이루는 도시를 꿈꿔보고 싶다.



품위 있는 삶의 터전을 위해서 개인의 욕망을 넘어 공동선을 지향해야만 한다. 창즤적 공간, 쾌적한 도시, 정체성 있는 국가는 그 자체로서 브랜드이며 경쟁력이다. 공공디자인은 그러한 모든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이자 방법이다. 도시환경은 시민사회의 그러한 전환을 촉진하는 형태로 재편성 되어야 한다.


 


 

석탄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이 일은 죽어가는 생명에 산소를 불어넣어 다시 탄생시키는 신성하기까지 한 작업이었다.

공업도시, 석탄 공장이라는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조건을 없애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점.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을 보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공공디자인의 힘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공디자인의 도입이 중요하다.


도시 공간 내에 공공디자인 도입에 의한 질적 환경창출 경향이 일반적이다.

문화재나 역사적 요소 등 과거의 흔적을 존중하고 이를 공간디자인의 주제로 연계한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한다.

유리나 섬유 소재 등을 활용한 시각적 변화와 개방성을 효율적으로 도입한다.


 


 

도시개발의 핵심 공통사항은 도시 이미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체 도시경관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개발계획부터 실시설계 수립, 건축심의와 준공까지 그 가이드라인에 따라 일관되게 적용, 관리해야 한다.

 

카나리 워프역 주변은 보행자 중심타운이다. 보행자에게 편리한 거리를 만드는 것은 거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자동차를 덜 타게 함으로써 친환경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의도이기도 하다.

 

‘공사 중’인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도시개발 전략의 중심에는 도시의 이미지 정체성을 확립시킬 수 있고 시민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공디자인이 확고히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최근 거리 시설물에 편의성과 더불어 도시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개발하여 시민들을 배려하고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확산이 단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어 쾌적한 환경을 이룰 때 도시는 새로운 활력을 찾아 나갈 것이다.


 

 


여행객들이 한국의 거리를 떠올릴 때 어떤 인상을 담게 될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걷고 싶은 거리, 여유 있는 일상, 유럽

유럽의 도시 곳곳에는 가로수와 조화를 이루는 보도, 식재의 생육환경을 고려한 보도가 많다. 도란도란 산책ㅎ고 싶은 욕구를 절로 일으키는 길이 많아서 그곳은 행복하다. 탁한 도심의 공기를 정화해줄 풍성한 나무가 자라고, 메마른 가슴을 적셔 줄 물이 흐르고,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하는 아름다운 꽃이 핀다. 나무와 물과 꽃과 함께 멋진 예술품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걷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휴식한다. 그러한 여유에서 창조가 솟아나고 문화는 더욱 성숙된다.

 

보도는 사람이 걷는 길인 것은 분명하지만 단지 걷기만 하는 공간은 아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이야기하고 보고 듣고 만지고 숨 쉰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주변 환경 사이의 관계가 생성되고 이어지는 곳이다.





우리는 공공디자인에 있어서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체계 사이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대립성과 차이를 극복하고 넘어서서 통합하고 공존하게 함으로써 인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이와 넘어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전북 부안

내소사, 來蘇寺




봄이 오는 내소사


3월 중순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봄이 아닌 늦겨울 같다는 생각이 마음에 남아있었지만 내소사에 피어나려는 산수유 나무를 보니 나도 모른 사이에 봄은 주변을 찾아왔다.


내소사 입구


부안에 들려 예전부터 들어본 유명한 사찰인 내소사를 찾았다. 내소사로 향하며 보이는 산새가 그림 같았다. 하지만 사찰 앞에 도착하자 번잡해 보이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로 어지럽다. 유명한 사찰이다보니 절을 관광오는 사람이 많아 자연스레 관광지 분위기이다. 마음의 안정을 갖을 사찰의 입구가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내소사로 향하는 삼문(三門)



식당가 거리가 끝나는 곳이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이 나온다. 관광지의 분위기를 단숨에 사찰의 분위기로 바꾸는 것이 사찰의 일주문이 아닌가 한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산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一柱門)


사찰의 입구에는 사찰을 담아준 산의 명칭이 함께 담겨있다. 내소사는 부안 내소사라 부르며 능가산 내소사라고도 많이 부른다. 일주문의 모양은 사찰마다 다른데 내소사에는 그림이 그려있지 않고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불교에서는 용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내소사의 일주문 대웅전 등에 있다.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묘사된다. 용이 불교에 받아들여 질 때의 본래의 모습대로,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부처의 주변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찰 입구에 있는 무지개다리 아래쪽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아, 개천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가 청정한 공간인 절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절의 일주문 천장에 조각된 용머리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법당 안의 기둥이나 벽에 그려진 용은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여 법당을 신성한 공간으로 만드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용이다. 또 불상 장식인 닫집에 조각된 용은 불법 수호의 의미와 함께, 왕의 최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부처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일주문의 여의주를 문 용 두마리


이에 비해 법당 정면의 기둥 위에 조각된 용은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저 언덕, 즉 피안 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탈것을 주로 배에 비유하였다. 그 배는 주로 용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를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즉 반야용선은 번뇌에 쌓인 이 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건너갈 때 타는 상상의 배인 셈이다. 법당은 바로 부처와 함께 극락세계로 가는 배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법당 앞쪽의 기둥머리나 계단의 소맷돌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법당이 곧 반야용선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즉 용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매표소가 있고, 유명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


사천왕문은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내소사의 사천완문은 17평의 목조 한와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오도송은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를 이르는 말. 게송(偈頌)의 하나이다.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본래 게와 송은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날은 목조 사천왕상 조성 불사 중이기에 내소사의 사천왕을 만자니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천왕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내소사가 보인다. 그리고 세번째 문이자 마지막 문인 봉래루가 나온다.


봉래루(蓬萊樓)


내소사 봉래루는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다. 이들 초석의 배치는 전면 5칸 12.23m로 각 기둥 사이가 215-244-305-244-215cm로 중앙의 칸으로 갈수록 넒어지고 있다. 측면은 외열 기둥 사이가 3칸으로 6.20m이며 각 기둥 사이는 215-190-215cm의 간격으로되어 있지만 내부는 2칸으로 각 칸이 310cm를 유지하고 있다.


봉래루 뒷편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봉래루 옆면


속설에는 “봉래루는 실상사의 누각으로 1415년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 하였으나 6.25전까지 분명 사찰이 존재하였는데 하필이면 다른 사찰의 누각을 내소사로 옮겨올 수도 없거니와 분명 문헌에서 증명하는 바이니 재론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봉래루에 오르면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시주질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봉래루 앞 연등


내소사 누각 배치도



관음봉 아래 내소사



봉래루 뒤로 들어가면 병풍같은 관음봉이 보이고, 내소사의 전경이 보인다. 관음봉의 높이는 433m로 높지는 않다. 전라북도 부안군의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있다. 내소사에서 관음봉을 지나 직소폭포와 저수지를 거쳐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이 국립공원의 한 축을 이룬다. 바위를 깎아세운 듯이 내소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일주문에서 시작해서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년(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


관음봉과 대웅전  [觀音峰] 


관음봉 서쪽으로는 망포대(望浦臺)와 신선암(神仙岩) 줄기가, 동쪽은 옥녀봉 줄기가 곰소만을 에워싸고 뻗어 있다. 주변 옥녀봉(432m)과 선계폭포, 선계암, 굴바위는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선계폭포가 있는 우반계곡은 허균이 한때 은거하여 홍길동전을 집필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관음봉 바로 아래 능선에 올라서면 남으로 곰소만이 호수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멀리 작은 해협 건너 고창군 일대와 선운산도립공원의 산들이 펼쳐진다.


조사전과 관음봉


내소사는 임진왜란때 절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조선인조11년(1633)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비롯 설선당 등을 중건 중수 하였다. 그 후 광무 6년(1902) 관해선사와 만허선사의 원력으로 증축불사가 있었으며, 전등회 조실이신 해안 선사의 참선지도로 인하여 수많은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정진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내소사를 있게한 우암 혜산 선사가 1983년 내소사에 주석하면서 다시 한 번 쇠락해진 전각 및 요사를 정비, 복원하여 오늘날의 내소사를 이루게 되었다.



내소사 느티나무



내소사 전경


내소사로 들어가니 정면으로 큰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약 천년을 살았고 나무 둘레가 8m 정도가 된다.


내소사 느티나무


거대한 느티나무가 마치 절을 수호하는 장군처럼 앞에 버티고 있다.


소원을 담은 기와



내소사의 범종



느티나무 양쪽 옆으로는 종이 있다. 왼편에는 고려 동종이 있는 보현각이 있고, 오른편에는 범종각이 있다.


보종각


보종각는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현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보종각에 있는 고려동종은 원래 내변산에 있는 청림사에서 고려 고종 9년(1222)에 만든 것이다.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겼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종으로, 높이는 1.03m, 직경은 67m, 무게 420kg 이다. 종을 매 다는 고리에 용을 새겼고, 종 가운데에 세 분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가운데 본조물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협시상은 서 있는 모습이다. 종의 윗 부분와 아랫부분에는 화려한 식물 문양을 새겼으며, 해바라기처럼 뾰족한 끝을 가진 연꽃 무늬가 종을 때리는 자리이다. 표면의 묘사수법이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 범종의 특징이 드러나있는 종이다.


범종각


범종각은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무설당



보현각 뒤편으로는 무설당이 있다. 


무설당


무설당 (無說堂)은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내소사 삼층석탑과 대웅보전



내소사의 중앙에는 대웅전과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내소사 3층석탑은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습니다. 하층기단은 전고 3.46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다. 이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되었습니다.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하였다.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을 각출하였습니다.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배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다.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三層石塔)



삼층석탑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내소사의 중심인 대웅전이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大雄殿)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대웅전 현판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 문살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꽃살은 나뭇결이 그대로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더욱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꽃문살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꽃 한잎 한잎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며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정갈하게 비쳐든다.



설선당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설선당이 있다.


설선당(說禪堂)


설선당은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다.


설선당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지장전과 지옥벽화, 명부10왕



대웅전의 왼편에는 지장전이 있다.


내소사 지장전 [地藏殿]


지장전은 21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명부10왕을 봉안한 전각으로 2010년에 건립하였다. 지장전(地藏殿)은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전의 둘레에는 제10지옥의 벽화가 그려있다. 요즘 인기있던 영화인 '신과 함께'에서 나온 지옥의 대왕의 모티브가 된 불교의 지옥왕을 볼 수 있다. 지옥과 이를 관장하는 대왕은 경전마다 다르다고 한다.


진광대왕


진광대왕은 죽은 자가 7일째 방문하는 명부의 판관으로, 생전의 선행을 사경대 (邪鏡臺) 로 조사하며 다른 왕에게 보내 심판과 벌을 받게 한다. 직접 벌을 주지는 않고 주심판관으로 생사나 수명을 관장한다.


초강대왕


초강대왕은 죽은 자가 14일째에 방문하는 명부의 판관으로 부정직한 중매, 사기 판매, 사람이나 동물을 해쳐 불구로 만든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송제대왕


송제대왕은 죽은 자가 21 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부정한 관리로서 속이거나 이익을 챙기고 배신,사람을 죽였거나 ,중상모략으로 남을 곤경에 빠트리게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오관대왕


오관대왕은 죽은 자가 28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베풀지 않았거나, 병든 환자를 속이고, 사기 판매 , 저울 눈금을 속인 상인 , 신 에 대한 불경, 사원에서의 도둑질을 한 자를 벌을 주는 판관이다.


염라대


염라대왕은 죽은 자가 35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악법을 따르고 ,함부로 살생을 하고,도둑질, 음행을 일삼고, 살인 , 도를 구하는 자를 죽인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평등대왕


평등 대왕은 죽은 자가 100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부모나 윗사람에게 효성이 부족한 자, 도둑질,사람을 죽인 자, 사음을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태산대왕


태산대왕은 죽은 자가 49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무덤을 파 헤쳐서 사람의 살을 먹거나 의료 목적에 이용, 인신매매로 사람을 팔고 사는 행위를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도시대왕


도시대왕은 죽은자가 1년이 지난 뒤 방문하는 판관으로 방화범, 낙태시술자,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글, 작품을 감상하고 읽은 사람, 이유 없이 자살을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오도전륜대왕


오도전륜대왕은 죽은 이의 죄를 심판하는 저승시왕 중 10번 째 왕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다스리고 생전의 행동을 심판하여 상벌을 주는 지옥의 열번째 왕이다. 죽은 넋이 3년째 되는 날에 오도전륜대왕에게 열 번째이자 마지막 심판을 받고 생전의 행위에 따라 다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진화사와 삼성각



지장전 뒤편으로는 진화사와 삼성각이 있다.


진화사 (眞華舍)


진화사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각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다.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다 삼성각의 현판은 구당의 글씨이다.



내소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나무에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보니 마치 오도전륜대왕으로 부터 환생을 받아 피어나는 생명 같이 느껴졌다.



부안 내소사


입장료 : 성인 3000원

주  소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전화번호 : 063-583-7281

홈페이지 : http://www.naesosa.kr/









도미노 피자

치즈케이크롤




치즈케이크롤


피자가 너무 땡기는 날에 어떤 피자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이전에 도미노피자의 새우 들어간 킹푸드 시프론 피자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서, 

요즘 광고하는 도미노 치즈케이크롤 피자를 주문했다.


도미노피자


송중기에 박보검까지 케이스에 ㄷㄷ 


도미노 피자 신제품


피자를 보니 도우를 얇게 반으로 갈라서 끝부분에 말아버렸다.

그래서 바닥은 얇고 바삭한 편이고, 치킨이 들어가고 트러플크림소스로 되어 있다.


중앙은 씬피자


끝부분은 도우를 말아 로마노 크림치즈와 치즈케이크무스, 파인애플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먹으며 생각한게 굳이 왜 말았지?

그냥 크러스트피자가 더 맛있는 것 같다 ㅠ.ㅠ

도우도 이런 피자는 씬피자보다 그냥 보통 두께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맛이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맛있지도 않다.


피자의 끝부분


함께 먹은 치킨텐더도 그냥 너겟이었다는...


도미노피자 치킨텐더





담쟁이 창문

Film

寫眞











2017年, 여름에


in Anseong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내소사 전나무 숲길


부안의 유명한 사찰인 내소사에는 전나무 숲길이 있다. 매표소인 일주문에서 부터 천왕문까지 높다란 전나무가 길의 양쪽으로 멋지게 자라 있다. 

약 600m정도로 잠시 걸으면 내소사가 나온다.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길가 양 옆으로 늘어진 전나무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푸른 색의 전나무 숲도 좋지만 나무가 붉게 물든 가을이나 눈이 온 날 들리면 더 멋질 것 같다.


내소사 가는 길


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하고, 높이는 40m에 달하고 작은 나뭇가지는 털이 없거나 약간 있으며 겨울눈에는 털이 없으며 수지가 약간 묻었다.


전나무 숲 이야기 


잎은 침형으로 길이 4㎝로서 뒷면에 흰 기공선(氣孔線)이 있다. 꽃은 4월 하순에 피고, 열매는 원통형이며 길이 10∼12㎝로서 위를 향하고 10월 초에 익는다. 실편(實片)은 둥글고 성숙하면 축에서 떨어지고 포는 나타나지 않는다.


전나무


우리나라 전국의 심산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추위에 강하여 전국 어디서나 월동이 가능하다. 생육적지는 토양습도가 높고 공중습도도 높은 곳이다. 비옥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어려서는 강한 나무그늘 속에서도 잘 자라는 음수이다. 재식한 뒤 7, 8년까지는 매우 느리게 자라지만 그 이상이 되면 생장속도가 빨라진다. 


전나무 숲 이야기


나무 모양이 아름다워서 도시 정원의 정원수나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공해와 에틸렌·아황산가스에 약하여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는 수종이다.


아름다운 숲 우수상


내소사


내소사 뒤의 관음봉




내소사 전나무 숲길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운주산성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날이 풀리며 운동을 할 겸 낮은 산을 찾아 오르기로 했는데,  첫번째로 가기로 한 산은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운주산이다. 운주산의 높이는 460m 정도로 오르기에 편하다. 


운주산 종합안내도


전동면 미곡리·청송리와 전의면 동교리·신정리 경계 지점에 솟아 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고산사라는 사찰이 있고,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서 고산산성이라고도 하는 운주산성이 있다.


운주산 등산로


운주산성 가는 길


등산로 입구에 있는 고산사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700m정도 10분가량을 오르면 운주산성의 입구에 도착한다.


산에 흔희 보이는 돌탑


작은 계곡물이 흐른다.


산을 오르다 보니 은사시나무가 종종 보인다. 은사시나무는 은수원사시나무라고도 한다. 계곡이나 산기슭 아래에서 잘 자란다. 1950년 미국산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 사이에서 생긴 자연잡종이다. 은백양과 비슷하지만 잎가장자리가 갈라지지 않고 가지가 더 적게 갈라지며 잎의 털이 떨어지기도 한다. 겨울눈은 달걀 모양이고 흰 털이 난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거나 타원형 또는 둥근 모양이며 길이 3∼8cm, 너비 2∼7cm이다. 불규칙한 이 모양의 톱니가 있으며 뒷면에는 흰 솜털이 빽빽이 난다. 잎자루는 길이 1∼5cm로서 납작하다.


은사시 나무


수원사시나무에 비해 잎에 털이 빽빽이 난다. 수원사시나무는 은사시나무에서 갈라진 종류로서 사시나무와 비슷하다.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인공적으로 교배하여 만든 것을 은수원사시나무 또는 현사시나무라고 하지만 은사시나무와 구별하기 어렵다. 관상수·가로수로 많이 심으며 생장력이 강하다. 민간에서는 나무껍질과 잎을 출혈·치통 등에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운주산성 입구


10분 가량 자연 돌계단을 밟고 오르니 운주산성 입구가 보인다. 입구는 복원된 것이기에 새것 같은 느낌이다. 운주산성 입구까지 임도(林道)가 나 있어 차를 타고 운주산성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고 광장 부근에서 정상으로 바로가면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고, 산성을 한바퀴 돌면 1시간 가량이 걸린다.


복원된 주산성


운주산성은 운주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남단 3개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전동면 3개 마을과 전의면 2개 마을에 위치한 대단히 큰 산성으로 길이 3,098m에 달하는 외성과 안쪽에는 543m에 달하는 내성이 있다. 외성과 내성은 모두 돌로 쌓았다. 


운주산성의 서편 무너진 곳


성내 평지 및 구릉에는 크로 작은 대지가 남아있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고려 조선시대의 자기조각,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운주산성의 동편과 건물터


이 산성을 두고 주류성이라 비정하기도 하는데,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운주산성 외에도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 등지가 주류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주산성에서 본 전의면


운주산성처럼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과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 결합된 이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산성 성곽로 걷기


운주산성은 산책 삼아 트래킹을 즐기는 가족여행지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경사를 오르는 등산로와 성벽을 따라 운주산 정상을 오른 후 다시 성벽을 따라 성벽길의 원점인 문지로 돌아오는 코스는 성벽을 따라 걷기도 하면서 숲 속의 오솔길을 걷기도 하는 등 문화유산답사와 가벼운 등산을 즐기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준다.


운주산 긴급신고 위치 스팟


운주산성 입구에 도착하여 왼쪽 산성을 따라 산성을 한바퀴 돌았다. 그 코스로 돌으니 119 긴급신고 위치표시 운주1에서 운주11 지역까지 차례대로 나온다. 산선 입구에서 30분가량을 가니 정상에 있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나온다.


백제의 얼 상징탑


운주산성이 나당연합군과 전쟁을 하던 곳이고, 백제가 망한 이후 부흥 운동을 하던 주류성이 운주산 주변이라는 학설이 있어서 인지, 백제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백제의 얼 상징탑, 건립기


운주산 정상


운주산 정상의 고유문 비석


‘백제의 얼 상징탑’이 세워져 있는 정상에서는 독립기념관, 천안시, 청주시가 바라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아산만까지 보인다. 


운주산 정상에서 바라 본 전경


정상 360도


정상에서의 풍경


천안시 병천면 일대 풍경


운주산에서 바라본 청주 방면


정상에서 오렌지와 군산 영국빵집에서 사왔던 보리만쥬 간식을 가볍게 먹고 산성길 동편으로 향하였다.


간식으로 먹은 보리만쥬


오렌지 먹고 내려가기


아직은 마른 잎


푸른 하늘과 소나무


운주산성 팔각정


팔각정과 하늘


팔각정에서 바라본 전의면




운주산과 운주산성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 산90

연락처 : 044-861-2114








백제 운주산 고산사




세종시 고산사


미세 먼지가 없이 맑은 날이 오랜만이기에 산에 가고 싶어 오랜만에 산으로 향하였다. 

높지 않은 산을 가고 싶어 어려서 갔던 산인 운주산에 갔다. 


고산사


운주산은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낮은 산이다. 해발고도가 460m정도로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천안 공주 조치원, 청주 일대를 볼 수 있다. 

에는 운주산성이 있고, 꼭대기에는 '백제인의 얼'이라는 탑이 있는 곳이다. 백제인의 얼이란 탑이 있듯 운주산은 백제와 연관이 많은 곳이다.


백제 운주산 고산사 일주문


운주산성은 백제군이 나당연합군과 싸우던 곳이다. 또한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주류성이 전의 일대라는 학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운주산 초입에 있는 고산사(高山寺)에도 백제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종루


입구에 가장 먼저보이는 종루의 이름은 백제루(百濟樓)이다. 종루부터 백제를 기리는 모습이 느껴진다. 


백제루


백제루 안에 있는 범종은 백제삼천범종이라 한다. 백제삼천범종은 백제의 의자대왕과 백제 부흥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극락완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조성된 범종이다.


백제루 옆 모습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백제 의자대왕은 왕비와 왕자를 비롯한 일만이천 명의 유민과 함께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갔다. 의자대왕은 나라를 잃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중국 낙양에서 병사하였고, 당나라 조정은 북망산에서 장사를 지내 줬으나 지금 왕릉은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제인들은 주류성에 모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부흥전쟁을 벌여 3년 여의 오랜 시간 동안 투쟁하였으나 내분과 오랜 전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백제삼천범종


그로부터 1,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타국만리에서 쓸쓸히 승하한 의자대왕과, 주류성에서 백제를 재건하려다 끝난 백제 부흥군의 명복을 빌고 극랑왕생을 기원하는 '백제삼천범종'을 조성하여 아미타 부처에게 시납한 것이라고 한다.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


백제루 아래를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가면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가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나당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는 원찰(願刹)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백제극락보전


법당의 현판도 '백제극락보전'이라 되어 있다. 극란전에서는 의자왕과 백제 부흥군, 원병으로 백촌강 전투에 참전한 왜군의 위패도 한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산사는 1966년에 창건된 사찰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운주산이 백제의 부흥군이 최후를 맞았다는 주류성 주변이라는 학설에서 이렇게 백제를 기리는 사찰이 생겨난 것이다.



주류성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서기 660년 7월 18일에 신라(新羅)·당(唐)의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사람들의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점차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복신(福信)이 웅거한 임존성(任存城)과 도침(道琛)이 이끄는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세력이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주류성을 공격하는 나당연합군을 크게 이겼으며, 이러한 기세로 부흥군은 200여성을 회복하였다. 웅진성 공격 실패와 옹산성(甕山城)에서의 패배로 그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나,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공격에 전념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이 돌아와(662년 5월) 부흥운동을 이끌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세력의 지휘부 내에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더욱이 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倭)가 보낸 병사 2만 7천명이 백강(白江)에서 궤멸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백제의 부흥운동은 이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에 비정하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어 위치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세종 운주산 고산사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고산길 92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88-3)

연락처 : 044-862-8093



 



유관순 열사 추모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Historic Site of Yu Gwan-sun



 

유관순 열사 동상

 


유관순 열사 유적, 天安柳寬順烈士遺蹟



천안시 병천면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볼 수 있다. 3.1운동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유관순 열사인데,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와 유관순 열사 유적지가 있고, 만세운동을 벌이던 아우내 장터가 있고, 주변 목천읍에는 독립기념관이 있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


유관순열사 유적지는 유관순열사의 69주기를 맞아 기공식을 갖고, 1990년 4월에 준공되어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관순의 고향 천안시 병천에 1만 5000평 대지 위에 세워진 유관순열사유적에는 추모각(追慕閣)과 영정(影幀), 만세부르는 모습의 동상, 안내판 등이 있다.



만세 부르는 유관순 열사

 

 아우내 삼일운동 독립 사적지

 

유관순 열사 추모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柳寬順烈士記念館


 

유관순 열사 유적지 입구에는 유관순 열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3년 4월 1일 건립한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


건평 542.7㎡, 지상 1층·지하 1층 규모로서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영상실·체험공간·뮤지엄숍 등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 입구


영상실에는 유관순이 출생하였을 때부터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함께 영상물로 꾸며놓았으며, 체험공간에는 유관순 열사가 고문당하던 상황을 체험해볼 수 있는 벽관 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007년 2월 28일에는 석천 윤여환이 그린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을 봉안하였다. 연중무휴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 9시부터 18시, 동절기(11월 ~2월)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열사의 생애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하였고,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학창시설의 유관순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유점선·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는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


추모각에서 본 아우내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추모각 입구


기념관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는 추모각이 나온다.

 

 

유관순 열사 추모각


 

유관순 열사 추모각


추모각은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의 빛난 얼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다. 


추모각과 담장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주위에 담당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으며,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선생이 썼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


유관순 열사 영정,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제78호


추모각에는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다.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 쥔 손을 무릅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루바닥 등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으며, 석천 윤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 되었다.


향로



유관순 열사 추모각 옆에는 순국자 추모각도 있다.

 

 

순국자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은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으로 순국한 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9년에 건립하였다.


 

 

 

유관순열사 유적지, 기념관, 추모지


전화번호 : 041-564-1223

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338-1

관람시간 : 매일 09:00 - 18:00 - 하절기(3월~10월) 연중무휴 / 매일 09:00 - 17:00 - 동절기(11월~2월) 연중무휴



 

 


 

부안 청자박물관

Buan Celadon Museum

 


 

청자잔 모양의 부안청자박물관

 

부안청자박물관은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살아 숨쉬는 고려의 상감청자를 만나 볼 수 있는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세계도자기 가운데 으뜸인 고려상감청자를 제작하였던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2011년 4월에 개관하였다.

국가사적 제69호인 유천리요지의 복원,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하였으며 비생의 청자잔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청자박물관 1층

 

3층으로 되어 있고, 전시동, 체험동과 야외사적공원 등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2층에서 1층으로 이어진다. 전시동 2층은 진품의 고려청자를 통해 청자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청자역사실, 청자명품실이 있다.

 

부안 사진 전시

 

청자역사실, Hall of Celadon History


 

청자역사실은 고려삼강청자의 아름다운 무늬와 청자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유천리7구역 청자가마터 발굴유물, 및 다양한 청자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 도자기의 역사

 

청자는 처음 중국에서 만들었던 제작기술을 고려시대에 받아들여 만들기 시작하여, 500여 년 동안 애용된 실용성과 장식성을 고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세계에서 자토로 만든 그릇에 유리질의 유약을 입혀 고온으로 구워낸 '자기'라는 것을 최초로 창조해낸 나라는 중국이며, 10세기경 중국 오월국의 국가 기밀이었던 자기제작기술을 전수받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나라가 한국이다.

 

영상 안내 공간

 

한국과 중국은 다른 나라가 16세기, 17세기까지 도기를 사용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자기를 만들 사용한 선진문물을 지닌 나라로 세계도자사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남북국시대(9~10세기 초) 사람들은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해 자기를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시대상호아 속에서 10세기경 중국 오월국이 북송에 의해 멸망하면서(978년) 월주요의 몇 몇 자기인들이 고려에 들어와서 그들에게 고려의 도기장인들이 청자 제작기술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로 고려 초의 자기 가마는 벽돌을 쌓아 만든 중국식 가마와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중국자기와 색과 형태, 무늬가 유사한 해무리굽 찻잔과 꽃모양 접시 등이 만들어졌다.

 

꽃모양 청자

 

고려 중기에도 중국과의 문물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청자의 형태와 유색, 그릇 굽는 방법, 무늬 등은 중국 북송대 여요와 남송대 관요와의 관련성이 엿보인다. 고려 중기인 12세기 후반 경에 우리만의 독자적인 삼강청자가 개발되었고,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삼강청자는 계속 유행하면서 일부 고급 청자에서는 중국 원나라 청화백자의 무늬와 그 형태를 닮은 청자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는 발생에서 쇠티까지 형태, 유색, 무늬 등에서 중국청자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으로 밀접한 영향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자양각연꽃모양향로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상감청자는 계속해서 유행하며 일부 고급 청자에서는 중국 원나라 청화백자의 무늬와 그릇 형태를 닮은 청자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 청자는 반복되는 무늬가 꽉차있어 화려해 보이지만 전성기의 맑은 비색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릇이 두꺼워 투박한 느낌을 준다.

 

청자 연화넝쿨무늬 접시 등

 

 주로 사용된 무늬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와 꽃, 나비, 버드나무와 갈대가 있는 물가에서 노니는 새의 모습, 긴 꼬리를 휘날리며 구름 사이를 나는 봉황, 점처럼 단순하게 표현된 그릇 사이를 나는 학의 모습, 별모양처럼 생긴 모란과 넝쿨을 표현한 꽃무늬 등이 있다.

 

청자 철백화 국화무늬 병

 

고려 말 쇠퇴기의 상감청자는 14세기 새롭게 등장하는 조선왕조로 이어져 분청사기의 무늬와 그릇형태에 큰 영향을 준다.

 

청자 음각 넝쿨무늬 입 넓은 병

 

청자 상감 봉황 연화넝쿨무늬 발

 

 

 

 

청자명품실, Room fo Materpiece Celadon


 

청자명품실은 명품청자와 나전칠기 전시대의 청자를 전시하여 생활 속에 청자의 쓰임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청자명품관

 

상감청자란 그릇 표면에 선이나 면으로 홈을 파고, 홈에 다른 색깔의 흙(하얀 흙, 붉은 흑)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무늬를 새긴 청자를 말하고, 철화청자란 유약을 입히기 전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안료를 사용하여 붓으로 그릇 표면에 그림을 그린 후 유약을 발라 구워낸 청자이다. 그리고 비색청자란 음각, 양각, 투각, 상형 등의 방법으로 무늬를 넣되 안료를 사용하지 않은 푸른빛이 나는 아름다운 청자이다.

고려청자

 

전북에는 유명한 고려시대 가마터가 많이 위치하고 있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가마터는 1983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1022년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던 고려 초기 가마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청자와 백자를 함께 제작하였으며, 찻잔, 잔과 잔받침대, 장고, 접시, 발, 병 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청자 상감 갈대무늬 주자

 

전남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가마터와 전난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 가마터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가마로 추정된다. 녹색을 띤 조질청자와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청자가 주류를 이루며,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씌워 검은 색이 감도는 흑유자기와 비색에 가까운 양질 청자도 소량 나왔다.

 

청자 연꽃줄기무늬 매병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18호 청자가마터는 부안청자를 대표하는 진서리 청자가마터 가운데 1990년에 발굴 조사된 곳이다. 무문청자를 비롯하여 음각, 압출양각, 철백화, 투각, 상감 등 다양한 기법으로 무늬를 장식한 찻잔, 발, 잔, 매병, 접시 등의 비색청자가 다량으로 제작되었으며, 가마도 1기가 조사되어 부안청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이 청자들은 부안청자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청자 구름무늬 병

 

또한 전북 부안국 보안면 유천리 3구역 청자가마터는 부안청자를 대표하는 유천리 청자가마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다. 정식으로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에서 유출된 파편이 이화여대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최상품의 비색청자와 삼강청자, 상감 백자 등이 나와 부안청자의 실체를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자 국화무늬 피리

 

청자 국화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청자 음각연화무늬 참외모양 주전자

 

고려청자와 불교문화 등 전시

 

청자와 자개

 

청자 바둑판

 

청자 서예도구

 

청자 불교 도구

 

2층 관람을 마치고 1층 전시동으로 가면 청자의 제작과정을 볼 수 있는 청자제작실, 놀이와 체험을 통해 청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청자 체험실, 국내외 박물관과 교류전 및 각종 특별전시를 위한 기획전시실, 특수영상실로 이루어져 있다.

 

 

청제제작실, Celadon Workshop


 

청자제작실은 갯벌에 묻힌 유물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바다터널을 지나 부안 앞 바다에 잠기었던 자기를 발굴하여 복원하는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자동문이 열려 들어갈 수가 있다. 상감청자의 제작과정과 개경으로 청자를 운반하는 경로를 볼 수 있다.

 

부안과 청자

 

무늬 새기기

 

조각된 흙 메우기

 

가마

 

개경으로 향하는 청자를 담은 배

 

 

청자체험실, Room of Experiencing Celadon


 

청자 무늬 탁본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실

 

청자 운학상감 항아리

 

백자 달항아리

 

 

 

전시관 1층


 

전시관을 천천히 둘러보니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냥 눈으로만 보고 빠르게 나오면 20분 정도이면 전부 둘러 볼 수 있을 것 같다.

1층 왼편에는 카페가 있고, 오른편에는 컵과 그릇, 접시 등을 저렴하게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전시관 1층 카페

 

독특한 모양의 판매중인 잔

 

다양한 청자 등도 판매 중이다.

 

 

 

부안청자박물관

 

주소 : 전북 부안군 보안면 청자로 1493 (유천리 798-4)

전화번호 : 063-580-3958

관람시간 : 3월~10월 (10:00~18:00), 11월~2월 (10:00~17:00)

휴관일 : 1월 1일, 추석날, 설날, 매주 월요일

관람료 : 어른 3,000원 / 청소년 군경 2,000원 / 어린이 1,000원)

 

 

 




부안 내소사

느티나무 식당




느티나무 식당


부안으로 여행을 와서, 줄포ic 주변의 제주쌈밥과 곰소항 주변의 횟집, 꽃게장식당 등 점심 식사 할 수 있는 곳을 몇곳 찾아 놓고 여행을 하다가, 점심시간 즈음에 도착한 곳이 내소사이기에 내소사 앞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소사 입구


유명한 절 앞에는 기념품가게와 식당들이 많이 있는데, 내소사도 관광지 같은 분위기이다. 내소사에 오기 전에 식사할 곳이 있나 찾아보니, 내소식당, 산촌식당, 느티나무식당의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내소식당은 초입에 있고, 느티나무식당은 거리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데, 식당가를 한번 둘러보려다 끝가지가서 돌아오기 귀찮아서 마지막에 있는 느티나무 식당에 들어갔다.


느티나무 식당 파전 굽는 곳


사실 마지막 식당이라서 들어가기도 했지만, 밖에서 파전을 굽고 계시는데, 음식 냄새가 좋아서 들어간 것이기도 하다.



느티나무 식당 입구


점심시간이 다되어가는 시간인데 생각보다 식당은 한산했다. 동네 분들이 두 테이블 식사를 하고 계셨고, 야외 테이블에 아저씨들이 파전에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식사를 마치고 나갈때에는 3팀 정도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당 실내


느티나무식당의 메뉴는 사찰 주변의 식당들처럼 산채비빔밥이 있고, 부안이라 그런지 백합죽과 바지락죽, 바지락회무침을 팔고 있었다.

산채정식은 다른 유명 사찰 앞의 식당보다는 약간 비싼편이다.


느티나무식당 메뉴와 가격


백합죽과 바지락무침은 저녁에 먹어볼 것이기에 패스하고, 산 아래의 느낌을 받고 싶어 산채비빔밥과 해물파전을 주문하였다. 두 메뉴는 많이 먹어본 평범한 맛이다. 산채비빔밥은 수덕사 주변에서 맛있게 먹어보고, 해물파전도 잘하는 식당이 많아서 그런지, 적당한 정도로 느껴졌다. 반찬은 전라도이지만 진하지 않고 깔끔하고 간결한 느낌이었다.


산채비빔밥과 반찬


산채비빔밥


해물파전


파전



느티나무 식당


주소 : 전북 부안군 진서면 입암길 21-13 느티나무식당 (진서면 석포리 229)

전화 : 063-581-7773

영업 : 매일 08:30~18:00






NamHae

with Film


폐교의 낙서, Welcome


남해바다


남해군


바다와 배


산과 바다


다랭이 마을


다랭이 마을


독일마을의 한 레스토랑


More Coffee


넝쿨


Wonderful My Life



2016年, 10月





From-Moon Travel in Buan

부안, 변산반도에서의 하루




변산반도 여행



[From-Moon 변산반도 당일치기 여행 일정]


청자박물관 → 내소사 곰소염전 → 부안영상테마파크  → 격포해변, 채석강 → 수성당 → 적벽강 새만금방조제






프렌치토스트와 셀러드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씻고,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와 셀러드로 가볍게 먹고 부안으로 출발~ ^^




부안 청자박물관



청자박물관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간을 타고 가다가 서해안고속도로로 바꾸어 줄포ic에서 나와

 변산반도의 남쪽에서 첫 여행을 시작했다.


 처음 들린 곳은 줄포IC에서 가까운 '부안 청자박물관'이다.


입장료 : 3000원


AM 10:30


청자양각연꽃모양향로


다양한 청자를 볼 수 있는 곳으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역사와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의미가 있을 곳이다.

주말인데 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이 우리 뿐이네 ㅠ.ㅠ


천천히 텍스트를 읽으며 관람하니 1시간 정도 볼 수 있었다.




느티나무집 식당



느티나무식당


다음 여행지인 내소사 입구에 가니 식당들이 많이 있다.

산 아래 묵, 파전 식당이 많이 있는 곳의 풍경이다.

11시 30분에 도착하여~ 내소사를 들어가기 전에 식사를 하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줄포의 '제주쌈밥'이나 곰소항의 '현정이네' 같은 식당을 들릴까 했는데,

시간이 바로 내소사로 오는게 좋을 것 같아 내소사 앞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기 전에 확인해보니, 내소식당과 느티나무집이 리뷰가 많던데 다른 식당도 비슷 비슷할 것 같다. ^^


AM 11:30


산채비빔밥


해물파전


산채비빔밥과 해물파전을 먹었는데, 익히 알고 있을 평범한 맛이다. 

역시 산채비빔밥은 수덕사 아래 식당들이 잘하는 것 같아 ^^;;

식사를 한 후에 내소사로 들어갔다.

내소사 입장료는 성인 3천원이다.




내소사, 來蘇寺



내소사 전나무길


내소사로 가는 길에는 전나무가 길게 늘어진 길이 유명하다. 

가을에 색이 붉게 되었을 때에 들리면 멋질 것 같다~ ^^

전나무숲길을 지나면 내소사가 나온다. 

내소사 입구는 벚꽃나무길이 있어 가을 뿐아니라 봄에도 꽤나 멋질 것 같았다.


PM 12:00


내소사


내소사는 사찰 자체도 멋지지만 절 뒤에 있는 관음봉이 절경이다.

부안에 오기전에 사실 1박을 하고 둘째날 쌍선봉, 직소폭포, 관음봉 등 등산을 하려했는데, 

사정이 생겨 하루만 여행을 하고 돌아가게 되어서 아쉬웠다. ㅠ.ㅠ

다음에 등산을 하러 한번 다시 와야겠다~^^


내소사





슬지제빵소



슬지제빵소


부안으로 오기 전에 부안의 카페를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괜찮은 카페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 슬지제빵소이고, 

또 딱히 갈만한 카페가 없어 슬지제빵소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갔다.


PM 13:30


슬지네찐빵


커피는 평범하지만 괜찮은 정도였고,  찐빵은 팥이 그렇게 달지않아 나는 좋았는데, 

민핫은 달지않아 평범했다고 입맛이 달랐다. 생크림찐빵이 커피와 마시기에 좋았다.

분위기는 여성이 참 좋아하게 생겼고, 사진을 찍을 스팟이 있어 인기를 끌만하다.

손님이 많아 좀 기다려야 할 수 있지만, 여행 중에 카페를 찾다보니

변산에 갈만한 카페도 이곳 정도인 것 같다.




곰소염전



곰소염전


슬지제빵소 길 건너에 곰소염전이 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들리는 곳인데, 이 날에는 염전이 비여있었다. ㅠ.ㅠ

천천히 한바퀴 돌아보고 다음 여행지로 향하였다.


물이 없던 곰소염전




부안영상테마파크



부안영상테마파크


사극 드라마 촬영을 많이 한 부안영상테마파크는 궁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3월 동안은 입장료가 무료이었다. ^^ Lucky~~


근정전


이곳은 창덕궁을 재현해 놓았는데 관리가 잘 되어 있지는 않았다. 

많이 훼손되고 생각보다는 그냥 그랬다. 

부안영상테마파크를 가는 것 보다는 진짜 창덕궁을 보는 것이 훨씬 좋다.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세트장이기에 왕의 자리에 올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PM 15:00


왕의 자리에서 바라본 누각




채석강



격포해변


변산반도를 온 것은 채석강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제서야 채석강을 보다니!! 설레이는 맘으로 채석강으로 향하였다.

채석강으로 가는 격포해변으로 들어가니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해가지고 있는 서해바다가 보인다.

울퉁불퉁 신기하게 생긴 퇴적암층을 지나 채석강의 신기한 풍경을 즐겼다.


PM 16:00


서해바다


신기한 퇴적암층


채석강




계화도 식당



계화도식당


변산반도에서 유명한 먹거리는 꽃게장, 백합죽, 바지락죽, 바지락무침, 바지락전이기에 

한번에 다먹을 수 있는 백합정식을 먹기 위해 대명리조트 앞에 있는 계화도 식당에 갔다.

백합정식이 3만원인데, 백합탕+백합찜+바지락죽+바지락무침+바지락전 이 나와서 한방에 끝 ^^!

백합찜이 개인적으로는 Good ^^


주변에 다른 식당으로는 선광식당, 군산식당, 새전주식당, 변산온천산장, 백합식당 등이 있었다. 

전부 리뷰도 많고 유명한 곳이니 아무곳이나 들려보아도 될 것 같다. ^^


PM 17:00


백합정식




수성당



수성당


저녁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배가 불러 산책을 할겸 수성당과 적벽강이 있는 곳으로 갔다.

수성당은 뭐하는 곳인지 몰랐는데, 가고보니 헐!!! 무속신앙과 관련된 곳이다.

어느 무속이지 수성다에서 제를 지내고 있었다 ㄷㄷㄷ

분위기가 요상해서 수성당 앞 바다를 짧게 보고 적벽강으로 향하였다.


PM 18:00


해지는 수성당 앞 바다




적벽강


적벽강


수성당에서 내려와 바로 옆에 있는 적벽강에 갔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라 노을이 멋지게 있는 적벽강을 볼 수는 없었다.

아~ 푸른하늘이 너무 그립다~

적벽강을 끝으로 부안 여행을 마무리했다.


새만금방조제를 타고 군산으로~ ^^


다음에 부안에 올때에는 쌍선봉, 직소폭포, 관음봉을 향하는 등산을 하러 와야겠다.~


PM 18:30





추구사이




누군가는 아래를 바라보고, 누군가는 위를 바라본다.

아래의 누구는 그곳만의 희망을 갖고,

위의 누구는 그곳만의 사랑을 갖는다.

너무 미천한 나는 그저 그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Deoksugung Palace

with Film


석조전, Deoksugung Seokjojeon, 德壽宮石造殿


근대와 현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Deoksugung, 國立現代美術館 德壽宮館] 


미술관 창


처마 [eaves]


덕수궁 중화전 [Deoksugung Junghwajeon, 德壽宮 中和殿]


덕수궁 석어당 [Deoksugung Seokeodang, 德壽宮昔御堂]


덕수궁 등나무


덕수궁 즉조당 [Deoksugung Jeukjodang, 德壽宮 卽阼堂]


바람의 문


덕수궁 돌담길, 여름에, 2017年 


Nikon F3


德壽宮



달리고 싶다


갤러퍼 차의 작은 말


말은 달리고 싶다.

광활한 벌판과 야생의 자연 속에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자연은 인간 덕분에 미로가 되었다.

말 또한 도구가 되어 버렸다.

매매의 대상으로, 경주의 선수로, 전쟁의 도구로,


말이 달리고 싶다는 것을 인간은 알고 있다.

그렇게 자동차의 조각으로 꾸며주지 않았는가

인간이 만든 엔진을 달고 마음껏 달려보라고...







유관순 열사 생가지



어려서 이곳을 들렸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가보니 색다른 기분이 든다. 



이곳에는 단지 이 작은 초가집만 있고 다른 볼거리가 없기에 여행을 하기 위하여 따로 이곳만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에 언제나 사람도 하나 없는 한산한 분위기이다. 천안에 살며 간간히 병천의 순대국밥을 먹으러 들릴 때에 잠깐 들리기는 하는데, 만약 외지에서 여행을 오는 것이라면 유관순 열사 생가지, 유관순 추모관, 병천 순대거리를 한번에 들리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을 같이 본다면 여행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병천순대거리는 유관순 열사가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인 아우네 장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싸리문을 지나면 보이는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生家址)는 작은 초가집으로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한 곳이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사망하였다.

 


유관순 뿐만이 아닌 그녀의 가족과 집안사람들 또한 3·1 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가족 및 집안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훈·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관순 본인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柳愚錫),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柳濟敬), 종조할아버지 유도기(柳道基) 등 8명이다.

 


 

유중권은 1919년 3월 13일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딸 유관순이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고 고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자, 동생 유중무·조인원 등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 명의 장꾼이 모여들었고, 오후 1시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장대에 큰 태극기를 매단 채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조인원, 유중권·이소제 부부, 김상헌, 김주헌, 김교선, 김상철, 조병호, 유관순 등이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일본 헌병 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이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끌고 가는 것을 본 유중권은 부인인 이소제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뒤따르며 필사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의 어머니이자 유중권의 아내인 이소제도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남편 유중권, 딸 유관순과 함께 헌병 주재소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소제는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남편이 죽자 더욱 열렬히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했고, 무도한 일본 경찰이 총을 난사하여 남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은 1919년 4월 1일의 공주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유우석이 자란 동면 지령리 마을은 1900년대 초 전 주민이 감리교로 개종하여 마을 자녀들이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다. 유우석은 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에서 조만형과 함께 공부했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때 유우석은 공주 영명학교 학생으로 공주에 있었기 때문에 병천 만세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같은 날 영명 학교가 중심이 된 공주 읍내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우석은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된 데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재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안창호 등이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에서 모임을 갖고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관회가 영명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고,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등사판으로 밀어 1천 장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때 유우석도 학생 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 동원과 「독립 선언서」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유우석은 노명우(盧明愚)·강윤(姜允)·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의한 뒤, 이튿날 오후 3시경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유우석은 다른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 서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저지로 좌절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났고, 유우석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8월 29일 공주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과 결혼하였으며, 1927년에는 원산 청년회(元山靑年會)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함흥 지방 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광복 후 유우석은 대한 노동 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전국 혁명자 총연맹 중앙 집행 위원, 통일 독립운동자 중앙 협의회 간사, 유도회 청년회 총본부장, 순국선열 유족회장 등을 역임하다 1968년 5월 28일 사망하였다.

 

  

유관순의 작은아버지이며 유중권의 동생인 유중무는 당시 지령리 교회 교사로, 병천 3·1 운동 주도자의 한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지령리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1912년 장남 유경석은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1914년경 딸 유예도를 이화 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세의 나이로 이화 학당 3학년 졸업반이었다. 이화 학당에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던 유예도가 유관순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운동을 벌이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유중권·유중무·조인원 등이 나서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 그리고 형인 유중권, 조카 유관순 등이 병천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는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라 총을 난사하였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중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들쳐 업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헌병들을 압박하며 인명 살상에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중무는 병천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며, 9월 11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의 사촌언니인 유예도는 유중무의 장녀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살의 나이로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다.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 선언문 선포식에 사촌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가하한 뒤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3월 13일에는 유관순과 함께 귀향하여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을 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였다.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선두에 섰던 큰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趙仁元)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아버지 유중무와 유관순 등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피신하여 두안골의 외가로 피신하였다. 수색의 손길이 외가까지 미쳐오자 외삼촌이 진천으로 피신시켰고, 다시 홍성으로 피신하여 광복의 그날까지 숨어 지냈다. 광복 후에는 농촌 계몽 지도원, 반탁 운동 지도 위원, 애국 부인회 지방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오촌조카이며 유중무의 손자인 유제경은 평소에 독립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주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앨범 편찬 위원이 되어 앨범에 일본 연호가 아닌 단군기원을 쓰고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1936년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시험에 제1종으로 합격하여 은산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1년 4월 1일 충남 공주군 장기(長岐) 국민 학교 6학년 담임교사로 있으면서, 천황을 신격화하고 한국인을 황민화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의식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일제의 주목을 받던 유제경은 학생들의 졸업 기념 사진첩에 “땀을 흘려라, 피를 흘려라, 눈물을 흘려라”라는 문구를 써 준 것이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행위라 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5년 2월 5일 고등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형무소 수감 중에 ‘해남도 파견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중국 하이난 섬[海南島]에 끌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귀환하였다.

 

 

 

유관순의 종조할아버지인 유도기는 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인원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서는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조인원·유중권 이소제 부부·유관순·김상헌·김주헌·김상철·김교선 등이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유도기도 몰래 감추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기세를 북돋우며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5월 9일 대전 지방 법원 공주 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렇듯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 및 집안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투쟁을 전개한 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유관순열사 생가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병천면 용두리 3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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