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내소사, 來蘇寺




봄이 오는 내소사


3월 중순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봄이 아닌 늦겨울 같다는 생각이 마음에 남아있었지만 내소사에 피어나려는 산수유 나무를 보니 나도 모른 사이에 봄은 주변을 찾아왔다.


내소사 입구


부안에 들려 예전부터 들어본 유명한 사찰인 내소사를 찾았다. 내소사로 향하며 보이는 산새가 그림 같았다. 하지만 사찰 앞에 도착하자 번잡해 보이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로 어지럽다. 유명한 사찰이다보니 절을 관광오는 사람이 많아 자연스레 관광지 분위기이다. 마음의 안정을 갖을 사찰의 입구가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내소사로 향하는 삼문(三門)



식당가 거리가 끝나는 곳이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이 나온다. 관광지의 분위기를 단숨에 사찰의 분위기로 바꾸는 것이 사찰의 일주문이 아닌가 한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산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一柱門)


사찰의 입구에는 사찰을 담아준 산의 명칭이 함께 담겨있다. 내소사는 부안 내소사라 부르며 능가산 내소사라고도 많이 부른다. 일주문의 모양은 사찰마다 다른데 내소사에는 그림이 그려있지 않고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불교에서는 용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내소사의 일주문 대웅전 등에 있다.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묘사된다. 용이 불교에 받아들여 질 때의 본래의 모습대로,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부처의 주변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찰 입구에 있는 무지개다리 아래쪽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아, 개천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가 청정한 공간인 절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절의 일주문 천장에 조각된 용머리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법당 안의 기둥이나 벽에 그려진 용은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여 법당을 신성한 공간으로 만드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용이다. 또 불상 장식인 닫집에 조각된 용은 불법 수호의 의미와 함께, 왕의 최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부처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일주문의 여의주를 문 용 두마리


이에 비해 법당 정면의 기둥 위에 조각된 용은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저 언덕, 즉 피안 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탈것을 주로 배에 비유하였다. 그 배는 주로 용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를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즉 반야용선은 번뇌에 쌓인 이 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건너갈 때 타는 상상의 배인 셈이다. 법당은 바로 부처와 함께 극락세계로 가는 배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법당 앞쪽의 기둥머리나 계단의 소맷돌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법당이 곧 반야용선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즉 용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매표소가 있고, 유명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


사천왕문은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내소사의 사천완문은 17평의 목조 한와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오도송은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를 이르는 말. 게송(偈頌)의 하나이다.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본래 게와 송은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날은 목조 사천왕상 조성 불사 중이기에 내소사의 사천왕을 만자니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천왕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내소사가 보인다. 그리고 세번째 문이자 마지막 문인 봉래루가 나온다.


봉래루(蓬萊樓)


내소사 봉래루는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다. 이들 초석의 배치는 전면 5칸 12.23m로 각 기둥 사이가 215-244-305-244-215cm로 중앙의 칸으로 갈수록 넒어지고 있다. 측면은 외열 기둥 사이가 3칸으로 6.20m이며 각 기둥 사이는 215-190-215cm의 간격으로되어 있지만 내부는 2칸으로 각 칸이 310cm를 유지하고 있다.


봉래루 뒷편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봉래루 옆면


속설에는 “봉래루는 실상사의 누각으로 1415년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 하였으나 6.25전까지 분명 사찰이 존재하였는데 하필이면 다른 사찰의 누각을 내소사로 옮겨올 수도 없거니와 분명 문헌에서 증명하는 바이니 재론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봉래루에 오르면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시주질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봉래루 앞 연등


내소사 누각 배치도



관음봉 아래 내소사



봉래루 뒤로 들어가면 병풍같은 관음봉이 보이고, 내소사의 전경이 보인다. 관음봉의 높이는 433m로 높지는 않다. 전라북도 부안군의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있다. 내소사에서 관음봉을 지나 직소폭포와 저수지를 거쳐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이 국립공원의 한 축을 이룬다. 바위를 깎아세운 듯이 내소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일주문에서 시작해서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년(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


관음봉과 대웅전  [觀音峰] 


관음봉 서쪽으로는 망포대(望浦臺)와 신선암(神仙岩) 줄기가, 동쪽은 옥녀봉 줄기가 곰소만을 에워싸고 뻗어 있다. 주변 옥녀봉(432m)과 선계폭포, 선계암, 굴바위는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선계폭포가 있는 우반계곡은 허균이 한때 은거하여 홍길동전을 집필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관음봉 바로 아래 능선에 올라서면 남으로 곰소만이 호수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멀리 작은 해협 건너 고창군 일대와 선운산도립공원의 산들이 펼쳐진다.


조사전과 관음봉


내소사는 임진왜란때 절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조선인조11년(1633)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비롯 설선당 등을 중건 중수 하였다. 그 후 광무 6년(1902) 관해선사와 만허선사의 원력으로 증축불사가 있었으며, 전등회 조실이신 해안 선사의 참선지도로 인하여 수많은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정진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내소사를 있게한 우암 혜산 선사가 1983년 내소사에 주석하면서 다시 한 번 쇠락해진 전각 및 요사를 정비, 복원하여 오늘날의 내소사를 이루게 되었다.



내소사 느티나무



내소사 전경


내소사로 들어가니 정면으로 큰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약 천년을 살았고 나무 둘레가 8m 정도가 된다.


내소사 느티나무


거대한 느티나무가 마치 절을 수호하는 장군처럼 앞에 버티고 있다.


소원을 담은 기와



내소사의 범종



느티나무 양쪽 옆으로는 종이 있다. 왼편에는 고려 동종이 있는 보현각이 있고, 오른편에는 범종각이 있다.


보종각


보종각는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현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보종각에 있는 고려동종은 원래 내변산에 있는 청림사에서 고려 고종 9년(1222)에 만든 것이다.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겼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종으로, 높이는 1.03m, 직경은 67m, 무게 420kg 이다. 종을 매 다는 고리에 용을 새겼고, 종 가운데에 세 분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가운데 본조물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협시상은 서 있는 모습이다. 종의 윗 부분와 아랫부분에는 화려한 식물 문양을 새겼으며, 해바라기처럼 뾰족한 끝을 가진 연꽃 무늬가 종을 때리는 자리이다. 표면의 묘사수법이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 범종의 특징이 드러나있는 종이다.


범종각


범종각은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무설당



보현각 뒤편으로는 무설당이 있다. 


무설당


무설당 (無說堂)은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내소사 삼층석탑과 대웅보전



내소사의 중앙에는 대웅전과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내소사 3층석탑은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습니다. 하층기단은 전고 3.46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다. 이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되었습니다.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하였다.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을 각출하였습니다.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배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다.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三層石塔)



삼층석탑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내소사의 중심인 대웅전이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大雄殿)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대웅전 현판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 문살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꽃살은 나뭇결이 그대로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더욱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꽃문살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꽃 한잎 한잎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며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정갈하게 비쳐든다.



설선당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설선당이 있다.


설선당(說禪堂)


설선당은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다.


설선당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지장전과 지옥벽화, 명부10왕



대웅전의 왼편에는 지장전이 있다.


내소사 지장전 [地藏殿]


지장전은 21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명부10왕을 봉안한 전각으로 2010년에 건립하였다. 지장전(地藏殿)은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전의 둘레에는 제10지옥의 벽화가 그려있다. 요즘 인기있던 영화인 '신과 함께'에서 나온 지옥의 대왕의 모티브가 된 불교의 지옥왕을 볼 수 있다. 지옥과 이를 관장하는 대왕은 경전마다 다르다고 한다.


진광대왕


진광대왕은 죽은 자가 7일째 방문하는 명부의 판관으로, 생전의 선행을 사경대 (邪鏡臺) 로 조사하며 다른 왕에게 보내 심판과 벌을 받게 한다. 직접 벌을 주지는 않고 주심판관으로 생사나 수명을 관장한다.


초강대왕


초강대왕은 죽은 자가 14일째에 방문하는 명부의 판관으로 부정직한 중매, 사기 판매, 사람이나 동물을 해쳐 불구로 만든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송제대왕


송제대왕은 죽은 자가 21 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부정한 관리로서 속이거나 이익을 챙기고 배신,사람을 죽였거나 ,중상모략으로 남을 곤경에 빠트리게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오관대왕


오관대왕은 죽은 자가 28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베풀지 않았거나, 병든 환자를 속이고, 사기 판매 , 저울 눈금을 속인 상인 , 신 에 대한 불경, 사원에서의 도둑질을 한 자를 벌을 주는 판관이다.


염라대


염라대왕은 죽은 자가 35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악법을 따르고 ,함부로 살생을 하고,도둑질, 음행을 일삼고, 살인 , 도를 구하는 자를 죽인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평등대왕


평등 대왕은 죽은 자가 100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부모나 윗사람에게 효성이 부족한 자, 도둑질,사람을 죽인 자, 사음을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태산대왕


태산대왕은 죽은 자가 49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무덤을 파 헤쳐서 사람의 살을 먹거나 의료 목적에 이용, 인신매매로 사람을 팔고 사는 행위를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도시대왕


도시대왕은 죽은자가 1년이 지난 뒤 방문하는 판관으로 방화범, 낙태시술자,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글, 작품을 감상하고 읽은 사람, 이유 없이 자살을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오도전륜대왕


오도전륜대왕은 죽은 이의 죄를 심판하는 저승시왕 중 10번 째 왕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다스리고 생전의 행동을 심판하여 상벌을 주는 지옥의 열번째 왕이다. 죽은 넋이 3년째 되는 날에 오도전륜대왕에게 열 번째이자 마지막 심판을 받고 생전의 행위에 따라 다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진화사와 삼성각



지장전 뒤편으로는 진화사와 삼성각이 있다.


진화사 (眞華舍)


진화사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각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다.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다 삼성각의 현판은 구당의 글씨이다.



내소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나무에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보니 마치 오도전륜대왕으로 부터 환생을 받아 피어나는 생명 같이 느껴졌다.



부안 내소사


입장료 : 성인 3000원

주  소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전화번호 : 063-583-7281

홈페이지 : http://www.naesosa.kr/









담쟁이 창문

Film

寫眞











2017年, 여름에


in Anseong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내소사 전나무 숲길


부안의 유명한 사찰인 내소사에는 전나무 숲길이 있다. 매표소인 일주문에서 부터 천왕문까지 높다란 전나무가 길의 양쪽으로 멋지게 자라 있다. 

약 600m정도로 잠시 걸으면 내소사가 나온다.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길가 양 옆으로 늘어진 전나무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푸른 색의 전나무 숲도 좋지만 나무가 붉게 물든 가을이나 눈이 온 날 들리면 더 멋질 것 같다.


내소사 가는 길


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하고, 높이는 40m에 달하고 작은 나뭇가지는 털이 없거나 약간 있으며 겨울눈에는 털이 없으며 수지가 약간 묻었다.


전나무 숲 이야기 


잎은 침형으로 길이 4㎝로서 뒷면에 흰 기공선(氣孔線)이 있다. 꽃은 4월 하순에 피고, 열매는 원통형이며 길이 10∼12㎝로서 위를 향하고 10월 초에 익는다. 실편(實片)은 둥글고 성숙하면 축에서 떨어지고 포는 나타나지 않는다.


전나무


우리나라 전국의 심산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추위에 강하여 전국 어디서나 월동이 가능하다. 생육적지는 토양습도가 높고 공중습도도 높은 곳이다. 비옥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어려서는 강한 나무그늘 속에서도 잘 자라는 음수이다. 재식한 뒤 7, 8년까지는 매우 느리게 자라지만 그 이상이 되면 생장속도가 빨라진다. 


전나무 숲 이야기


나무 모양이 아름다워서 도시 정원의 정원수나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공해와 에틸렌·아황산가스에 약하여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는 수종이다.


아름다운 숲 우수상


내소사


내소사 뒤의 관음봉




내소사 전나무 숲길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운주산성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날이 풀리며 운동을 할 겸 낮은 산을 찾아 오르기로 했는데,  첫번째로 가기로 한 산은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운주산이다. 운주산의 높이는 460m 정도로 오르기에 편하다. 


운주산 종합안내도


전동면 미곡리·청송리와 전의면 동교리·신정리 경계 지점에 솟아 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고산사라는 사찰이 있고,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서 고산산성이라고도 하는 운주산성이 있다.


운주산 등산로


운주산성 가는 길


등산로 입구에 있는 고산사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700m정도 10분가량을 오르면 운주산성의 입구에 도착한다.


산에 흔희 보이는 돌탑


작은 계곡물이 흐른다.


산을 오르다 보니 은사시나무가 종종 보인다. 은사시나무는 은수원사시나무라고도 한다. 계곡이나 산기슭 아래에서 잘 자란다. 1950년 미국산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 사이에서 생긴 자연잡종이다. 은백양과 비슷하지만 잎가장자리가 갈라지지 않고 가지가 더 적게 갈라지며 잎의 털이 떨어지기도 한다. 겨울눈은 달걀 모양이고 흰 털이 난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거나 타원형 또는 둥근 모양이며 길이 3∼8cm, 너비 2∼7cm이다. 불규칙한 이 모양의 톱니가 있으며 뒷면에는 흰 솜털이 빽빽이 난다. 잎자루는 길이 1∼5cm로서 납작하다.


은사시 나무


수원사시나무에 비해 잎에 털이 빽빽이 난다. 수원사시나무는 은사시나무에서 갈라진 종류로서 사시나무와 비슷하다.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인공적으로 교배하여 만든 것을 은수원사시나무 또는 현사시나무라고 하지만 은사시나무와 구별하기 어렵다. 관상수·가로수로 많이 심으며 생장력이 강하다. 민간에서는 나무껍질과 잎을 출혈·치통 등에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운주산성 입구


10분 가량 자연 돌계단을 밟고 오르니 운주산성 입구가 보인다. 입구는 복원된 것이기에 새것 같은 느낌이다. 운주산성 입구까지 임도(林道)가 나 있어 차를 타고 운주산성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고 광장 부근에서 정상으로 바로가면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고, 산성을 한바퀴 돌면 1시간 가량이 걸린다.


복원된 주산성


운주산성은 운주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남단 3개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전동면 3개 마을과 전의면 2개 마을에 위치한 대단히 큰 산성으로 길이 3,098m에 달하는 외성과 안쪽에는 543m에 달하는 내성이 있다. 외성과 내성은 모두 돌로 쌓았다. 


운주산성의 서편 무너진 곳


성내 평지 및 구릉에는 크로 작은 대지가 남아있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고려 조선시대의 자기조각,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운주산성의 동편과 건물터


이 산성을 두고 주류성이라 비정하기도 하는데,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운주산성 외에도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 등지가 주류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주산성에서 본 전의면


운주산성처럼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과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 결합된 이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산성 성곽로 걷기


운주산성은 산책 삼아 트래킹을 즐기는 가족여행지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경사를 오르는 등산로와 성벽을 따라 운주산 정상을 오른 후 다시 성벽을 따라 성벽길의 원점인 문지로 돌아오는 코스는 성벽을 따라 걷기도 하면서 숲 속의 오솔길을 걷기도 하는 등 문화유산답사와 가벼운 등산을 즐기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준다.


운주산 긴급신고 위치 스팟


운주산성 입구에 도착하여 왼쪽 산성을 따라 산성을 한바퀴 돌았다. 그 코스로 돌으니 119 긴급신고 위치표시 운주1에서 운주11 지역까지 차례대로 나온다. 산선 입구에서 30분가량을 가니 정상에 있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나온다.


백제의 얼 상징탑


운주산성이 나당연합군과 전쟁을 하던 곳이고, 백제가 망한 이후 부흥 운동을 하던 주류성이 운주산 주변이라는 학설이 있어서 인지, 백제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백제의 얼 상징탑, 건립기


운주산 정상


운주산 정상의 고유문 비석


‘백제의 얼 상징탑’이 세워져 있는 정상에서는 독립기념관, 천안시, 청주시가 바라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아산만까지 보인다. 


운주산 정상에서 바라 본 전경


정상 360도


정상에서의 풍경


천안시 병천면 일대 풍경


운주산에서 바라본 청주 방면


정상에서 오렌지와 군산 영국빵집에서 사왔던 보리만쥬 간식을 가볍게 먹고 산성길 동편으로 향하였다.


간식으로 먹은 보리만쥬


오렌지 먹고 내려가기


아직은 마른 잎


푸른 하늘과 소나무


운주산성 팔각정


팔각정과 하늘


팔각정에서 바라본 전의면




운주산과 운주산성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 산90

연락처 : 044-861-2114








백제 운주산 고산사




세종시 고산사


미세 먼지가 없이 맑은 날이 오랜만이기에 산에 가고 싶어 오랜만에 산으로 향하였다. 

높지 않은 산을 가고 싶어 어려서 갔던 산인 운주산에 갔다. 


고산사


운주산은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낮은 산이다. 해발고도가 460m정도로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천안 공주 조치원, 청주 일대를 볼 수 있다. 

에는 운주산성이 있고, 꼭대기에는 '백제인의 얼'이라는 탑이 있는 곳이다. 백제인의 얼이란 탑이 있듯 운주산은 백제와 연관이 많은 곳이다.


백제 운주산 고산사 일주문


운주산성은 백제군이 나당연합군과 싸우던 곳이다. 또한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주류성이 전의 일대라는 학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운주산 초입에 있는 고산사(高山寺)에도 백제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종루


입구에 가장 먼저보이는 종루의 이름은 백제루(百濟樓)이다. 종루부터 백제를 기리는 모습이 느껴진다. 


백제루


백제루 안에 있는 범종은 백제삼천범종이라 한다. 백제삼천범종은 백제의 의자대왕과 백제 부흥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극락완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조성된 범종이다.


백제루 옆 모습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백제 의자대왕은 왕비와 왕자를 비롯한 일만이천 명의 유민과 함께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갔다. 의자대왕은 나라를 잃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중국 낙양에서 병사하였고, 당나라 조정은 북망산에서 장사를 지내 줬으나 지금 왕릉은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제인들은 주류성에 모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부흥전쟁을 벌여 3년 여의 오랜 시간 동안 투쟁하였으나 내분과 오랜 전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백제삼천범종


그로부터 1,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타국만리에서 쓸쓸히 승하한 의자대왕과, 주류성에서 백제를 재건하려다 끝난 백제 부흥군의 명복을 빌고 극랑왕생을 기원하는 '백제삼천범종'을 조성하여 아미타 부처에게 시납한 것이라고 한다.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


백제루 아래를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가면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가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나당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는 원찰(願刹)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백제극락보전


법당의 현판도 '백제극락보전'이라 되어 있다. 극란전에서는 의자왕과 백제 부흥군, 원병으로 백촌강 전투에 참전한 왜군의 위패도 한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산사는 1966년에 창건된 사찰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운주산이 백제의 부흥군이 최후를 맞았다는 주류성 주변이라는 학설에서 이렇게 백제를 기리는 사찰이 생겨난 것이다.



주류성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서기 660년 7월 18일에 신라(新羅)·당(唐)의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사람들의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점차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복신(福信)이 웅거한 임존성(任存城)과 도침(道琛)이 이끄는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세력이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주류성을 공격하는 나당연합군을 크게 이겼으며, 이러한 기세로 부흥군은 200여성을 회복하였다. 웅진성 공격 실패와 옹산성(甕山城)에서의 패배로 그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나,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공격에 전념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이 돌아와(662년 5월) 부흥운동을 이끌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세력의 지휘부 내에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더욱이 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倭)가 보낸 병사 2만 7천명이 백강(白江)에서 궤멸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백제의 부흥운동은 이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에 비정하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어 위치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세종 운주산 고산사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고산길 92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88-3)

연락처 : 044-862-8093



 



유관순 열사 추모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Historic Site of Yu Gwan-sun



 

유관순 열사 동상

 


유관순 열사 유적, 天安柳寬順烈士遺蹟



천안시 병천면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볼 수 있다. 3.1운동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유관순 열사인데,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와 유관순 열사 유적지가 있고, 만세운동을 벌이던 아우내 장터가 있고, 주변 목천읍에는 독립기념관이 있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


유관순열사 유적지는 유관순열사의 69주기를 맞아 기공식을 갖고, 1990년 4월에 준공되어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관순의 고향 천안시 병천에 1만 5000평 대지 위에 세워진 유관순열사유적에는 추모각(追慕閣)과 영정(影幀), 만세부르는 모습의 동상, 안내판 등이 있다.



만세 부르는 유관순 열사

 

 아우내 삼일운동 독립 사적지

 

유관순 열사 추모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柳寬順烈士記念館


 

유관순 열사 유적지 입구에는 유관순 열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3년 4월 1일 건립한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


건평 542.7㎡, 지상 1층·지하 1층 규모로서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영상실·체험공간·뮤지엄숍 등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 입구


영상실에는 유관순이 출생하였을 때부터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함께 영상물로 꾸며놓았으며, 체험공간에는 유관순 열사가 고문당하던 상황을 체험해볼 수 있는 벽관 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007년 2월 28일에는 석천 윤여환이 그린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을 봉안하였다. 연중무휴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 9시부터 18시, 동절기(11월 ~2월)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열사의 생애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하였고,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학창시설의 유관순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유점선·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는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


추모각에서 본 아우내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추모각 입구


기념관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는 추모각이 나온다.

 

 

유관순 열사 추모각


 

유관순 열사 추모각


추모각은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의 빛난 얼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다. 


추모각과 담장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주위에 담당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으며,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선생이 썼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


유관순 열사 영정,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제78호


추모각에는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다.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 쥔 손을 무릅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루바닥 등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으며, 석천 윤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 되었다.


향로



유관순 열사 추모각 옆에는 순국자 추모각도 있다.

 

 

순국자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은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으로 순국한 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9년에 건립하였다.


 

 

 

유관순열사 유적지, 기념관, 추모지


전화번호 : 041-564-1223

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338-1

관람시간 : 매일 09:00 - 18:00 - 하절기(3월~10월) 연중무휴 / 매일 09:00 - 17:00 - 동절기(11월~2월) 연중무휴



 

 


 

부안 청자박물관

Buan Celadon Museum

 


 

청자잔 모양의 부안청자박물관

 

부안청자박물관은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살아 숨쉬는 고려의 상감청자를 만나 볼 수 있는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세계도자기 가운데 으뜸인 고려상감청자를 제작하였던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2011년 4월에 개관하였다.

국가사적 제69호인 유천리요지의 복원,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하였으며 비생의 청자잔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청자박물관 1층

 

3층으로 되어 있고, 전시동, 체험동과 야외사적공원 등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2층에서 1층으로 이어진다. 전시동 2층은 진품의 고려청자를 통해 청자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청자역사실, 청자명품실이 있다.

 

부안 사진 전시

 

청자역사실, Hall of Celadon History


 

청자역사실은 고려삼강청자의 아름다운 무늬와 청자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유천리7구역 청자가마터 발굴유물, 및 다양한 청자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 도자기의 역사

 

청자는 처음 중국에서 만들었던 제작기술을 고려시대에 받아들여 만들기 시작하여, 500여 년 동안 애용된 실용성과 장식성을 고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세계에서 자토로 만든 그릇에 유리질의 유약을 입혀 고온으로 구워낸 '자기'라는 것을 최초로 창조해낸 나라는 중국이며, 10세기경 중국 오월국의 국가 기밀이었던 자기제작기술을 전수받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나라가 한국이다.

 

영상 안내 공간

 

한국과 중국은 다른 나라가 16세기, 17세기까지 도기를 사용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자기를 만들 사용한 선진문물을 지닌 나라로 세계도자사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남북국시대(9~10세기 초) 사람들은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해 자기를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시대상호아 속에서 10세기경 중국 오월국이 북송에 의해 멸망하면서(978년) 월주요의 몇 몇 자기인들이 고려에 들어와서 그들에게 고려의 도기장인들이 청자 제작기술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로 고려 초의 자기 가마는 벽돌을 쌓아 만든 중국식 가마와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중국자기와 색과 형태, 무늬가 유사한 해무리굽 찻잔과 꽃모양 접시 등이 만들어졌다.

 

꽃모양 청자

 

고려 중기에도 중국과의 문물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청자의 형태와 유색, 그릇 굽는 방법, 무늬 등은 중국 북송대 여요와 남송대 관요와의 관련성이 엿보인다. 고려 중기인 12세기 후반 경에 우리만의 독자적인 삼강청자가 개발되었고,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삼강청자는 계속 유행하면서 일부 고급 청자에서는 중국 원나라 청화백자의 무늬와 그 형태를 닮은 청자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는 발생에서 쇠티까지 형태, 유색, 무늬 등에서 중국청자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으로 밀접한 영향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자양각연꽃모양향로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상감청자는 계속해서 유행하며 일부 고급 청자에서는 중국 원나라 청화백자의 무늬와 그릇 형태를 닮은 청자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 청자는 반복되는 무늬가 꽉차있어 화려해 보이지만 전성기의 맑은 비색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릇이 두꺼워 투박한 느낌을 준다.

 

청자 연화넝쿨무늬 접시 등

 

 주로 사용된 무늬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와 꽃, 나비, 버드나무와 갈대가 있는 물가에서 노니는 새의 모습, 긴 꼬리를 휘날리며 구름 사이를 나는 봉황, 점처럼 단순하게 표현된 그릇 사이를 나는 학의 모습, 별모양처럼 생긴 모란과 넝쿨을 표현한 꽃무늬 등이 있다.

 

청자 철백화 국화무늬 병

 

고려 말 쇠퇴기의 상감청자는 14세기 새롭게 등장하는 조선왕조로 이어져 분청사기의 무늬와 그릇형태에 큰 영향을 준다.

 

청자 음각 넝쿨무늬 입 넓은 병

 

청자 상감 봉황 연화넝쿨무늬 발

 

 

 

 

청자명품실, Room fo Materpiece Celadon


 

청자명품실은 명품청자와 나전칠기 전시대의 청자를 전시하여 생활 속에 청자의 쓰임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청자명품관

 

상감청자란 그릇 표면에 선이나 면으로 홈을 파고, 홈에 다른 색깔의 흙(하얀 흙, 붉은 흑)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무늬를 새긴 청자를 말하고, 철화청자란 유약을 입히기 전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안료를 사용하여 붓으로 그릇 표면에 그림을 그린 후 유약을 발라 구워낸 청자이다. 그리고 비색청자란 음각, 양각, 투각, 상형 등의 방법으로 무늬를 넣되 안료를 사용하지 않은 푸른빛이 나는 아름다운 청자이다.

고려청자

 

전북에는 유명한 고려시대 가마터가 많이 위치하고 있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가마터는 1983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1022년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던 고려 초기 가마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청자와 백자를 함께 제작하였으며, 찻잔, 잔과 잔받침대, 장고, 접시, 발, 병 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청자 상감 갈대무늬 주자

 

전남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가마터와 전난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 가마터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가마로 추정된다. 녹색을 띤 조질청자와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청자가 주류를 이루며,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씌워 검은 색이 감도는 흑유자기와 비색에 가까운 양질 청자도 소량 나왔다.

 

청자 연꽃줄기무늬 매병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18호 청자가마터는 부안청자를 대표하는 진서리 청자가마터 가운데 1990년에 발굴 조사된 곳이다. 무문청자를 비롯하여 음각, 압출양각, 철백화, 투각, 상감 등 다양한 기법으로 무늬를 장식한 찻잔, 발, 잔, 매병, 접시 등의 비색청자가 다량으로 제작되었으며, 가마도 1기가 조사되어 부안청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이 청자들은 부안청자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청자 구름무늬 병

 

또한 전북 부안국 보안면 유천리 3구역 청자가마터는 부안청자를 대표하는 유천리 청자가마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다. 정식으로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에서 유출된 파편이 이화여대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최상품의 비색청자와 삼강청자, 상감 백자 등이 나와 부안청자의 실체를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자 국화무늬 피리

 

청자 국화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청자 음각연화무늬 참외모양 주전자

 

고려청자와 불교문화 등 전시

 

청자와 자개

 

청자 바둑판

 

청자 서예도구

 

청자 불교 도구

 

2층 관람을 마치고 1층 전시동으로 가면 청자의 제작과정을 볼 수 있는 청자제작실, 놀이와 체험을 통해 청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청자 체험실, 국내외 박물관과 교류전 및 각종 특별전시를 위한 기획전시실, 특수영상실로 이루어져 있다.

 

 

청제제작실, Celadon Workshop


 

청자제작실은 갯벌에 묻힌 유물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바다터널을 지나 부안 앞 바다에 잠기었던 자기를 발굴하여 복원하는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자동문이 열려 들어갈 수가 있다. 상감청자의 제작과정과 개경으로 청자를 운반하는 경로를 볼 수 있다.

 

부안과 청자

 

무늬 새기기

 

조각된 흙 메우기

 

가마

 

개경으로 향하는 청자를 담은 배

 

 

청자체험실, Room of Experiencing Celadon


 

청자 무늬 탁본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실

 

청자 운학상감 항아리

 

백자 달항아리

 

 

 

전시관 1층


 

전시관을 천천히 둘러보니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냥 눈으로만 보고 빠르게 나오면 20분 정도이면 전부 둘러 볼 수 있을 것 같다.

1층 왼편에는 카페가 있고, 오른편에는 컵과 그릇, 접시 등을 저렴하게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전시관 1층 카페

 

독특한 모양의 판매중인 잔

 

다양한 청자 등도 판매 중이다.

 

 

 

부안청자박물관

 

주소 : 전북 부안군 보안면 청자로 1493 (유천리 798-4)

전화번호 : 063-580-3958

관람시간 : 3월~10월 (10:00~18:00), 11월~2월 (10:00~17:00)

휴관일 : 1월 1일, 추석날, 설날, 매주 월요일

관람료 : 어른 3,000원 / 청소년 군경 2,000원 / 어린이 1,000원)

 

 

 


NamHae

with Film


폐교의 낙서, Welcome


남해바다


남해군


바다와 배


산과 바다


다랭이 마을


다랭이 마을


독일마을의 한 레스토랑


More Coffee


넝쿨


Wonderful My Life



2016年, 10月





From-Moon Travel in Buan

부안, 변산반도에서의 하루




변산반도 여행



[From-Moon 변산반도 당일치기 여행 일정]


청자박물관 → 내소사 곰소염전 → 부안영상테마파크  → 격포해변, 채석강 → 수성당 → 적벽강 새만금방조제






프렌치토스트와 셀러드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씻고,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와 셀러드로 가볍게 먹고 부안으로 출발~ ^^




부안 청자박물관



청자박물관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간을 타고 가다가 서해안고속도로로 바꾸어 줄포ic에서 나와

 변산반도의 남쪽에서 첫 여행을 시작했다.


 처음 들린 곳은 줄포IC에서 가까운 '부안 청자박물관'이다.


입장료 : 3000원


AM 10:30


청자양각연꽃모양향로


다양한 청자를 볼 수 있는 곳으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역사와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의미가 있을 곳이다.

주말인데 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이 우리 뿐이네 ㅠ.ㅠ


천천히 텍스트를 읽으며 관람하니 1시간 정도 볼 수 있었다.




느티나무집 식당



느티나무식당


다음 여행지인 내소사 입구에 가니 식당들이 많이 있다.

산 아래 묵, 파전 식당이 많이 있는 곳의 풍경이다.

11시 30분에 도착하여~ 내소사를 들어가기 전에 식사를 하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줄포의 '제주쌈밥'이나 곰소항의 '현정이네' 같은 식당을 들릴까 했는데,

시간이 바로 내소사로 오는게 좋을 것 같아 내소사 앞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기 전에 확인해보니, 내소식당과 느티나무집이 리뷰가 많던데 다른 식당도 비슷 비슷할 것 같다. ^^


AM 11:30


산채비빔밥


해물파전


산채비빔밥과 해물파전을 먹었는데, 익히 알고 있을 평범한 맛이다. 

역시 산채비빔밥은 수덕사 아래 식당들이 잘하는 것 같아 ^^;;

식사를 한 후에 내소사로 들어갔다.

내소사 입장료는 성인 3천원이다.




내소사, 來蘇寺



내소사 전나무길


내소사로 가는 길에는 전나무가 길게 늘어진 길이 유명하다. 

가을에 색이 붉게 되었을 때에 들리면 멋질 것 같다~ ^^

전나무숲길을 지나면 내소사가 나온다. 

내소사 입구는 벚꽃나무길이 있어 가을 뿐아니라 봄에도 꽤나 멋질 것 같았다.


PM 12:00


내소사


내소사는 사찰 자체도 멋지지만 절 뒤에 있는 관음봉이 절경이다.

부안에 오기전에 사실 1박을 하고 둘째날 쌍선봉, 직소폭포, 관음봉 등 등산을 하려했는데, 

사정이 생겨 하루만 여행을 하고 돌아가게 되어서 아쉬웠다. ㅠ.ㅠ

다음에 등산을 하러 한번 다시 와야겠다~^^


내소사





슬지제빵소



슬지제빵소


부안으로 오기 전에 부안의 카페를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괜찮은 카페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 슬지제빵소이고, 

또 딱히 갈만한 카페가 없어 슬지제빵소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갔다.


PM 13:30


슬지네찐빵


커피는 평범하지만 괜찮은 정도였고,  찐빵은 팥이 그렇게 달지않아 나는 좋았는데, 

민핫은 달지않아 평범했다고 입맛이 달랐다. 생크림찐빵이 커피와 마시기에 좋았다.

분위기는 여성이 참 좋아하게 생겼고, 사진을 찍을 스팟이 있어 인기를 끌만하다.

손님이 많아 좀 기다려야 할 수 있지만, 여행 중에 카페를 찾다보니

변산에 갈만한 카페도 이곳 정도인 것 같다.




곰소염전



곰소염전


슬지제빵소 길 건너에 곰소염전이 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들리는 곳인데, 이 날에는 염전이 비여있었다. ㅠ.ㅠ

천천히 한바퀴 돌아보고 다음 여행지로 향하였다.


물이 없던 곰소염전




부안영상테마파크



부안영상테마파크


사극 드라마 촬영을 많이 한 부안영상테마파크는 궁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3월 동안은 입장료가 무료이었다. ^^ Lucky~~


근정전


이곳은 창덕궁을 재현해 놓았는데 관리가 잘 되어 있지는 않았다. 

많이 훼손되고 생각보다는 그냥 그랬다. 

부안영상테마파크를 가는 것 보다는 진짜 창덕궁을 보는 것이 훨씬 좋다.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세트장이기에 왕의 자리에 올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PM 15:00


왕의 자리에서 바라본 누각




채석강



격포해변


변산반도를 온 것은 채석강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제서야 채석강을 보다니!! 설레이는 맘으로 채석강으로 향하였다.

채석강으로 가는 격포해변으로 들어가니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해가지고 있는 서해바다가 보인다.

울퉁불퉁 신기하게 생긴 퇴적암층을 지나 채석강의 신기한 풍경을 즐겼다.


PM 16:00


서해바다


신기한 퇴적암층


채석강




계화도 식당



계화도식당


변산반도에서 유명한 먹거리는 꽃게장, 백합죽, 바지락죽, 바지락무침, 바지락전이기에 

한번에 다먹을 수 있는 백합정식을 먹기 위해 대명리조트 앞에 있는 계화도 식당에 갔다.

백합정식이 3만원인데, 백합탕+백합찜+바지락죽+바지락무침+바지락전 이 나와서 한방에 끝 ^^!

백합찜이 개인적으로는 Good ^^


주변에 다른 식당으로는 선광식당, 군산식당, 새전주식당, 변산온천산장, 백합식당 등이 있었다. 

전부 리뷰도 많고 유명한 곳이니 아무곳이나 들려보아도 될 것 같다. ^^


PM 17:00


백합정식




수성당



수성당


저녁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배가 불러 산책을 할겸 수성당과 적벽강이 있는 곳으로 갔다.

수성당은 뭐하는 곳인지 몰랐는데, 가고보니 헐!!! 무속신앙과 관련된 곳이다.

어느 무속이지 수성다에서 제를 지내고 있었다 ㄷㄷㄷ

분위기가 요상해서 수성당 앞 바다를 짧게 보고 적벽강으로 향하였다.


PM 18:00


해지는 수성당 앞 바다




적벽강


적벽강


수성당에서 내려와 바로 옆에 있는 적벽강에 갔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라 노을이 멋지게 있는 적벽강을 볼 수는 없었다.

아~ 푸른하늘이 너무 그립다~

적벽강을 끝으로 부안 여행을 마무리했다.


새만금방조제를 타고 군산으로~ ^^


다음에 부안에 올때에는 쌍선봉, 직소폭포, 관음봉을 향하는 등산을 하러 와야겠다.~


PM 18:30





추구사이




누군가는 아래를 바라보고, 누군가는 위를 바라본다.

아래의 누구는 그곳만의 희망을 갖고,

위의 누구는 그곳만의 사랑을 갖는다.

너무 미천한 나는 그저 그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Deoksugung Palace

with Film


석조전, Deoksugung Seokjojeon, 德壽宮石造殿


근대와 현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Deoksugung, 國立現代美術館 德壽宮館] 


미술관 창


처마 [eaves]


덕수궁 중화전 [Deoksugung Junghwajeon, 德壽宮 中和殿]


덕수궁 석어당 [Deoksugung Seokeodang, 德壽宮昔御堂]


덕수궁 등나무


덕수궁 즉조당 [Deoksugung Jeukjodang, 德壽宮 卽阼堂]


바람의 문


덕수궁 돌담길, 여름에, 2017年 


Nikon F3


德壽宮



달리고 싶다


갤러퍼 차의 작은 말


말은 달리고 싶다.

광활한 벌판과 야생의 자연 속에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자연은 인간 덕분에 미로가 되었다.

말 또한 도구가 되어 버렸다.

매매의 대상으로, 경주의 선수로, 전쟁의 도구로,


말이 달리고 싶다는 것을 인간은 알고 있다.

그렇게 자동차의 조각으로 꾸며주지 않았는가

인간이 만든 엔진을 달고 마음껏 달려보라고...






추억의 붕어빵




시장 한켠에 고소한 붕어빵 냄새 바람을 타고 물결친다.

코가 먼저 눈이 다음에 붕어빵을 따라 추억이라는 시간으로 떠나간다.

따뜻한 붕어빵과 웃고, 즐기던 시간들,

이미 간식을 넘어 우리의 소중한 樂의 매개체가 되었다.




사슴 눈망울



사슴아, 너의 깊은 눈망울 속에는 가식이란 찾아볼 수가 없구나

단지 먹고, 뛰고, 자고 어느 본능에 맡겨 지금의 순간ㅇ르 보내고 있구나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많은 생각을 한단다.


사슴이라는 객체에 대해서도

너에 대한 보존을, 너에 대한 가치를, 너에 대한 이익을, 너의 존재 자체를,

사람들은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생각을 가지며 살아간단다.


물론 잠시 그러지 않을 때도 있어

바로 이 순간

너의 깊은 눈을 바로보고 있는 지금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단다.




비상을 꿈꾸며


인천 월미도 앞 바다에서



네 이름이 조나단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어,

아마도 네게는 이름이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게도 너만의 꿈은 있겠지?

대기권을 넘어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갈 수 있는 꿈의 공간은 

누구에게나 주워진 특권이겠지?


내 마음까지 함께 가지고 

저 멀리 떠나가 주렴,

한낱 갈매기야, 


한낱 인간의 꿈을 꾸게 해다오.




 

청주 상당산성

上黨山城

 



▲ 상당산성

 

주말에 날씨가 좋아서 산책 겸 살짝 걷고 싶어, 청주에 있는 상당산성에 갔다. 상당산성은 성벽이 고스란히 복원되어, 성벽을 타고 한바퀴를 돌아 볼 수 있는 곳이다. 성 한바퀴의 거리가 4.2km로 한시간 반정도를 걸을 수 있다.

 

상당산성 산행거리 : 4.2km(약 1시간 30분 소요)

남문 → (10분) → 남암문  → (20분) → 서문 → (40분) → 동암문 → (10분) → 동문,동장대 → (5분) → 저수지 → 남문

 

 

▲ 성벽길

 

상당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산성이라는 이름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인 서원소경이 청주에 설치되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산성의 면적은 12.6ha, 성 둘레 4,400m이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 청주, 상당산성

 

8부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동서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蛇行)하는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4.2㎞의 유구가 잘 남아 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약 3∼4m에 이른다.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상당산성은 상당산의 계곡과 분지를 감싸듯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사적 제212호 (지정일 1970년 10월 01일)

 

현재 남아 있는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將臺), 15개의 포루(砲樓)터 외에 성안 주둔병력의 식수를 대기 위한 대소 2곳의 연못이 있다. 정문인 남문 주변에는 3개의 치성과 장대, 4곳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 상당산성 입체조감도

 

숙종 때의 개축 이후에도 1731년(영조 7) 남문 문루를 세우는 등 대대적인 보수를 했으며, 1802년(순조 2) 1,176개의 첩(堞)을 시설하여 산성으로서의 완벽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성벽이 퇴락하고 문루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1971년 석축 부분을 개축하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서문·동문의 누문을 모두 복원하였다.

 

▲ 남문, 공남문(控南門)

 

상당산성 주차장을 통항 산성으로 오르면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이 남문이다. 세문 중에 가장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 공남문 현판

 

공남문은 상당산성의 정문이자 남문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문이 뚫려도 쉽게 들어서지 못하도록 성문 뒤쪽에 옹벽이 있다.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지금은 석축 부분만 남아 있고, 성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 남문 홍예문 밖의 모습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무지개처럼 윗부분이 둥근 문)으로, 특이하게도 도깨비문양이 그려져 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문루(門樓) 천장에는 불을 다스리는 남쪽의 수호신인 주작 그림이 있다.

 

▲ 주작그림

 

문루를 통해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으며 좌우로 4.4km에 이르는 좁은 성벽길이 있다. 성문 앞에는 드넓은 잔디언덕이 펼쳐지며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도 있다.


▲ 문루에서 본 풍경

남문에서 산성길을 따라 서문으로 향하였다.

 

▲ 산성길

 

상당산성을 한 바퀴를 돌아보는 코스는 가벼운 산행으로 제격이고 무리가 없어 좋다.

 

▲ 산성 서쪽 풍경

 

남문에서 서문으로 가다보면 서쪽으로 청주와 청원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서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청주시 북쪽 풍경

 

▲ 청주 공항가는 길도 보인다

 

청주의 멋진 경치를 즐기며 약간의 능선을 따라 가면 서문인 미호문이 보인다.

 

▲ 서문, 미호문 (弭虎門)

 

서문은 평문으로 거대한 2개의 무사석을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올려 놓았다. 이 문은 성벽이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옹성의 형태를 취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 서문 뒷 편

 

서문을 지나 성의 북편으로 가면, 따로 북문은 존재하지 않고, 동편의 동문인 진동문이 나온다.

 

▲ 성의 북쪽 부분

 

▲ 동문, 진동문(鎭東門)

 

동문은 우리나라 산성에 흔한 평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문은 무사석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2개 올려놓아 안정감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서문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 동문 뒷 편

 

동문 바로 옆에는 동장대가 있다.

 

▲ 동장대(東將臺)

 

동장대는 상당산성 동쪽에서 서장대와 마주 보고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서장대는 물론 남문과 수문, 성 안쪽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1747년(영조 23)에 동장대를 세우고 쓴 보화정기(輔和亭記)가 전한다. 보화정이란 '모든 주민들의 화합된 의지로 지킨다.'라는 뜻이며, 1992년 6칸 크기로 복원하였다. 동장대와 맞은 편에는 서장대가 있다. 서장대는 동장대와 짝하여 상당산성 내에서 군대의 점호 및 지휘를 맡아본 곳이다. 상령산 서쪽 높은 봉우리 동쪽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 동장대와 마주본다. 1776년 혹은 1836년 기와를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1995년 발굴조사를 통해 6칸 크기의 터를 확인하였고 2014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 저수지

 

동문에서 길을 따라 성 안쪽으로 내려오면 작은 마을과 저수지가 있다. 전에 동남방에 수구(水口)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 저수지와 식당가

 

▲ 성 안쪽에 있는 안내소, 상당마실

 

성 안 쪽에는 민속마을이 만들어져있다고 되어 있는데, 가보니 순전히 식당 천지이다. 오리백숙, 두부집, 청국장집, 더덕구이 등을 팔고 있는 식당만 보인다. 식당들은 꽤나 인기가 있는지 손님이 가득하다. 식당가 주변으로도 주차장이 있어 마을에 주차를 한 후에 남문부터 서문 동문으로 한 바퀴를 돌아도 좋을 것 같다.

 

 

산성길을 걷기 위해 온 것이기에 식사는 이미 하고 와서, 식당을 따로 들리지 않았고, 가는 길에 군밤 파는 곳이 있어서, 간식으로 군밤을 먹었다. ^^;;

 

아직은 추운 날씨라 따뜻한 군밤이 몸의 기운을 채워주었다~

 

▲ 성 안에 얼어있는 논두렁

 

 

상당산성

 

전화번호 : 043-200-2227

주소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 28-2

 



대륙기차에서


2003年, 중국 베이징 서역에서 서안으로 가는 기차


여행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일과 생각하지 못한 추억도 생겨난다. 중국여행을 하며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달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중국의 기차를 타본 것은 2003년 노동절 기간에 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있는 연길에서 친구가 사는 길림시에 가기위해 잉워를 타본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중국의 기차는 '루완워'라는 4인실 침대칸과 '잉워'라는 6인 3층 침대가 나열되어 있는 종류의 침대칸이 있고, '잉쭤'라는 좀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칸이 있었다. 


처음 탄 기차는 잉워를 타고 8시간 정도를 달린 것인데, 밤에 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렸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다며, 한국에는 없는 침대칸 기차를 타는 것이 신기했다. 기차를 타니 그 칸을 담당하는 역무원이 와서 표를 달라고 한다. 왜 표를 달라고 하는지 모르고, 그냥 확인차원에서 달라고 하는가 보다 하며, 표를 주니, 표는 가져가고 금속으로된 표로 바꿔주었다. 나중에 내릴 때 알게 된 것인데, 오랜 시간을 가다보니, 자는 사람도 있고 해서 내리는 시간에 다시와 그 금속으로 된 것을 다시 가져다 주며 깨워주기도 하고, 다음 역이 내리는 곳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상당히 좋았다. 친구들끼리 수다도 떨며 잠이 들고 다음날 새벽에 길림에 도착하여 처음의 기차 여행을 마쳤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탔던 기차는 여름에 연길에서 북경에 가는 기차를 타고 20시간 정도를 갔다. 그때에도 잉워를 타고 갔는데, 잠자기 전에 보았던, 옥수수 밭의 풍경이 자고 일어나도 똑같은 옥수수 밭이기에 도대체 얼마나 옥수수를 키우는 곳이 넓은지 의아해 했다. 거의 대부분 잉워를 타고 이동을 했던 것 같다. 기차 안에는 생각보다 외국인이 없었다. 외국인인 저에게 여행 중이냐며 말을 붙이는 사람도 있고, 기차 안의 중국사람과 함께 음식도 먹고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데 북경의 서역에서 장안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바로 옆 침대에 외국인 배낭여행객이 있었는데, 여자의 키가 너무 커서 침대 밖으로 하얀 발이 뛰어나온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하얀 발의 발바닥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 새까만 것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크게 웃지는 못하고 작게 큭큭 거리던 것이 기억이 난다. 


북경의 서역은 2003년 서안에 갈 때와 2004년 낙양에 갈 때 두번 이용을 해보았는데, 북경역보다 세련되고 좋았다. 북경과 낙양은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8시간 정도는 간 것 같다. 중국의 기차를 탈 때마다 장기간을 움직이다보니, 기차에 타기 전에 먹을 것을 잔득 사서, 들어가곤 한다. 기차 안에서 음식 카트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잠시 멈추는 역의 플랫폼에 라면이나 밥과 도시락 같은 것을 팔고 있기는 한데, 플랫폼에서 파는 것은 멀리에 있으면, 기차가 출발해버릴까봐 조마조마 하며 빨리 달려가 음식을 사오기도 했다. 식사로는 라면과 도시락 그리고 미리 사가지고 온 버거를 먹거나 했다. 음식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해도 하루 정도를 기차 안에 있으면, 상당히 지루하기는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빨리 시간이 지나간다. 한국에서는 3시간 정도만 기차를 타고 가도 너무 지루하고 시간이 왜 이리 가지 않는가 하며 답답한 마음도 많았는데, 중국에서 기차를 차며 내리기 5시간 정도가 되었을 때에 내릴 때가 다되었다며, 짐을 정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었던 때도 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타본 것은 계림과 장안을 이동할 때 걸린 28시간 이었다. 밤 11시에 기차를 타고 하루를 기차에서 보낸 후 다음날 새벽 1시에 기차에서 내렸다. 하도 오래 가다보니, 밤에 잘때에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쪽으로 달리던 것이, 아침에 눈을 뜨니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고 일어나니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며 혼자 마음을 쓸어 내렸다. 그렇게 놀라며 갔던 계림에서는 새벽에 비가 부슬부슬 내려와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갑자기 쓸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즐거움이 더한 시간이었다. 


그런 즐거움은 기차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쑤저우에서 청도로 가는 기차에서는 귀여운 꼬마아이와 친해져 함께 놀기도 하고, 한 번은 역무원과 친해져 함께 사진도 찍고 그랬다. 그 역무원은 처음에 중국말을 못하는 줄알고 있었는데, 통로를 청소하며 오던 역무원이 책을 읽고 있던 제 근처까지 오기에 쓰레기가 없다고 말을 하니, 10시간 정도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중국말을 해서인지, "뭐야~ 중국말을 할 줄 알잖아~" 하며 꿍얼거리며 가기도 했다. 그 역무원은 다른 칸에도 한국인이 있다며, 갑자기 그 한국분을 소개시켜주어 내려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잉워를 타고 다니며 있던 일들이었는데, 잉워 말고도 루완워와 잉쭤도 모두 타보았다. 루완워는 상당히 아늑하고 좋은 4인실 침대칸이다. 누을 수 있는 공간도 넓은 편이고, 조용하고 더 깨끗해서 좋았다. 그리고 다른 독특한 기차로는 항주에서 상해로 가는 기차는 약간 빠른 의자칸 기차였는데, 기차가 2층이었다. 2층 버스는 타본 적이 있는데, 2층 기차는 처음 타보아서 신기했다. 중국의 가장 발전된 도시인 상하이로 가는 기차라 그런지 상당히 깨끗한 기차였다. 


가장 타기 힘튼 기차는 바로 잉쭤라는 자리이다. 잉쭤는 한국의 예전 통일호를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습다. 약간은 딱딱한 의자칸인데, 그런 기차칸을 타고 톈진에서 연길까지 18시간 정도를 타고 갔다. 잉쭤를 탄 것은 다른 표를 구할 수가 없어서 타게 되긴 했지만, 그때의 동행과 나중에 창가쪽 자리를 바꿔가며 앉아가기로 하고 탔었다. 심양까지가면 자리를 바꾸기로 했는데, 끝까지 바꿔주지 않는 친한 형님을 보며 구박을 했다. 잉쭤의 자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말고도 입석처럼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그 수가 많다. 의자 밑에 누워서 가는 사람도 있고, 내 다리 바로 앞에 쪼그려 앉은 사람도 있어서 다리를 10시간 정도 펴지도 못하고 갔다. 화장실을 쓰는 사람도 많아 한참을 기다려 들어가기도 했다. 연길로 가는 기차이다보니, 조선족들이 기차안에 있어 말이 편하게 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두산을 여행하려고 기차에 탄 한국인 여자 두 분도 같은 칸에 있어서 이야기도 하고 했다.


이런 저런 중국의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지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북한의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톈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 있는 분이 뭐라고 말을 건다. 중국어도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못 알아들었다. 중국에 있은 지 오래 되어서 한국말과 비슷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못 알아 들었던 것이었다. 다시 잘 들어보니 한국말이기는 한데, 좀 억양이 이상했다.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해주고, 기차를 탔더니, 그 할아버지도 같은 기차칸에 계셨다. 역에서 대화를 한번 해서인지, 말을 먼저 붙여오셨다.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명태를 팔기위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국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왕래를 하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찰라에 할아버지께서 내게 물어본다. 한국에서는 '아버지'를 뭐라고 부르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한국에서도 '아버지'라고 합니다." 라고 답을 했더니 또 물어보신다. 그럼 한국에서는 '친구'를 뭐라 부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국에서도 친구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며, 옆에 앉아있는 중국사람에게 중국말로 이야기를 한다. 자기가 쓰는 말과 한국에서 쓰는 말이 같다며 중국인에게 말을 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어떤 의미의 웃음이었는지, 알듯 모르듯 묘한 감정이 제게도 찾아왔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니, 한국의 분단 상황이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을 벗어나, 정치와 권력인 소수를 위한 분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분단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남한과 북한의 대립관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전에도 통일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말을 쓰며 수 천년을 함께 보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 반백년이 조금 넘은 우리 민족에게 이별은 긴 시간만은 아닌 것 같다. 기차를 타고 간도 지역으로 향하며, 언젠가 삶이 끝나기 전에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이 대륙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기약했다. 


과연 그런 날은 올 수 있을까?




Paul Yoon's Daily


- 2018.02.02~04.




창문을 열어보니 하늘이 푸르다. 

얼마만에 보는 푸른 하늘 인가, 요즘 겨울 날씨는 삼한사미라고 한다. 삼일은 춥고 사일은 미세먼지라는 말이다. 일주일 내내 추위와 미세먼지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던 중에 이렇게 푸른 하늘을 보니 무거운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기에 충분한 느낌이 든다.


▲ 밝은 하루


푸른 하늘에 현혹되어 일단 밖으로 나가 차에 음악을 틀고 운전을 해 근교의 한적한 곳을 찾아 갔다. 산책을 할겸 아산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에 갔다. 그런데 이런... 칼바람이 불어, 너무 추웠다는 ㅠ.ㅠ


▲ 외암민속마을 나들이


춥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마시는 맑은 공기가 상쾌했다. ^^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맑은 하늘을 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 진것인지 서글프다.


▲ 민속마을 산책


집에는 제라늄이 피었다. 요즘 계속 몽우리 있더니 기어이 꽃을 피웠다. ^^

제라늄은 이파리를 건들이면 냄새가 고약한데, 꽃이 자주피고 참 예쁜 식물이다.~~


▲ 제라늄


꽃이 핀 기념으로 거실의 구조를 바꾸어 봤다. 거실에서 책도 보고 노트북도 하려 테이블을 두개나 꺼내 놓았다.


▲ 집 정리 했어요~


테이블 하나는 창문에 붙여 밖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게 하고, 하나는 길게 놓아 거실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나름 깔끔하게 보여 책보기 좋은 구조가 되었다. ^^


▲ 아담한 거실


거실 구조를 바꾼 기념으로 독서 ㄱㄱ


▲ 주말 독서


책을 좋아하는 민핫도 함께 독서 모드로 돌입했다. ^^


▲ 독서 중이신 ^^


내가 요즘 읽은 책이, 람세스, 무소유, 간디 자서전,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이라, 이번 주는 머리를 풀어주려,

무려 무협지를 읽었다. 역시 무협소설 술술 읽어지는 것은 최고이다. ㅋ


▲ 무협소설


With Coffee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믹스커피이다. 

얼마 전에 아시는 분이 내게 "카페를 자주 다니고 커피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니, 믹스커피는 마셔도 맛이 없지요?"라고 물었다.


나는 거침없이 답했다. 


"믹스커피 만큼 맛있는게 없지요 ~^^;;"


아무리 커피를 많이 마셔도, 아직도 내게 하루의 첫 커피는 믹스커피이다.


▲ 군산에서 산 예쁜 컵에 담은 믹스커피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커피도 좋아한다. 

그 중에서는 매일에서 나온 바리스타커피를 좋아한다.  특히 '에스프레소 라떼' 맛이 가장 맛있다. ^^

편의점에서 간간히 1+1으로 판매할때 냉장고에 채워두고, 오랜 시간 운전을 하거나, 여행을 갈때에 챙겨가곤하는 인스턴트 커피이다.


▲ 바리스타커피


이번 주말 카페에서 즐긴 커피는 라떼이다. 


매번 카페에 들릴때마다 주구장창 카푸치노만 마신다. 

전에 한 친구가 "전체적인 커피의 깊이는 내가 더 자부심이 있으나, 카푸치노 한 우물만 파는 자네에겐 카푸치노에 대해 논할 여지가 없군."이라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요즘은 진정 맛있는 카푸치노를 찾는 기쁨을 만나기 어려워, 차라리 라떼를 즐긴다. 우유 폼의 부드러움에 타협하며 마시는 커피가 라떼이다.


▲ 카페라떼




With Food



사람은 먹는 동물인가?

요즘 내가 먹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정말 다양한 요리를 즐기다 보니, 평소에는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어, 미각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는 일의 특성상으로 모임과 만남이 많아 외식을 많이 하는 편이라 그런가 보다.

그래서 요즘은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 것이 더 좋다.


▲ 집에서 만든 치킨


금요일 밤에는 집에서 나의 단짝 민핫이 냉장고의 닭가슴살을 소비하겠다고 남은 닭가슴살을 전부 튀겨 버렸다.

튀기면 다 맛있다나? ㅋㅋ


▲ 홈 후라이드 치킨


나름 바질가루도 넣고, 튀김 색도 예쁘게 나왔다. 원래도 치킨을 주문해 먹으면 뻑뻑살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닭가슴살 튀김이 꽤나 많이 좋았다. ^^ 아직은 치킨 튀김 수준이지만 곧 주문해 먹는 것보다 맛있게 나올 것을 예상해본다. ㅎㅎ


▲ 치킨튀김


금요일 밤 치킨에 맥주가 빠지면 실 없는 바늘이 아닐까?

얼른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치맥으로 불금을 보낸다.


▲ 불금 치맥


전에 한동안 라면을 엄청 많이 먹은 적이 있었다. 

라면에 진미채, 콩나물, 깻잎, 뽕나무잎, 숙주, 스팸, 고추잎 등 다양한 것을 넣어 먹어보며, 나름 인스턴트 라면을 끓이는 조예가 생겼다. ㅋㅋ

짜파게티도 꽤나 잘 끓인다. 면이 반쯤 익었을 때에 물을 반 정도 버리고, 스프 넣고 쎈 불에 쫄여가며 볶아버리면 상당히 맛있는 짜파게티가 된다. 거기에 계란후라이 살짝 올리면 금상첨화이다. ^^


▲ 짜파게티 & 계란프라이


간식으로 작은 마르게리따 피자를 사먹었는데, 

음~ 비쥬얼이 마르게리따라기 보다는 두꺼운 빵에 치즈 조금에 바질가루 뿌린 피자빵이다. ㅋㅋ

이거 내가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ㅠ.ㅠ 

다음 주말에 한번 만들어볼까? 고민 중이라는...


▲ 마르게리따 피자


토요일 저녁은 쭈꾸미볶음으로 정했다.

얼마 전에 사무실 사람들과 들렸던 곳인데 맛이 괜찮아서 다시 들렸다.

숯불쭈꾸미볶음이 유명한 집인데, 개인적으로는 숯불 보다 일반 볶음이 더 맛있었다.

맵지는 않게 먹은 것 같은데, 이마에서는 나도 몰래 땀이 흐른다. ^^;


▲ 쭈꾸미볶음


맘스터치에서 버거도 먹었는데, 평소 자주 먹던 햄치즈휠렛버거와 사이버거가 아닌 리샐버거를 먹어보았다. 왠 리코타치즈 같은 것에 쌈에 들어가는 야채가 들어가서 개성이 있었다. ㅋㅋ


▲ 맘스터치, 리샐버거


버거와 함께 맥주도 한병 마셨는데, 서양의 요리 버거에 동양의 맥주인 칭따오를 함께 먹으니 기분이 묘하다. 중국 맥주는 역시 연변에서 마셨던 빙천맥주가 최고였는데, 오랜만에 차가운 빙천 마시고 싶다 ㅠ.ㅠ


▲ 칭따오 맥주


일요일 밤에도 차분히 하루를 마무리하며, 필라이트 맥주 한 잔 ^^


▲ 필라이트 맥주



With Photo



날이 좋아 오랜만에 바라본 푸른 하늘

마음의 눈이 내 자신이 아닌 공허한 하늘의 푸른 빛으로도 이렇게 충만한 것을

일상의 발걸음을 두고 좁은 몇 몇의 공간만에서 존재하며 

얼마나 편협한 시간을 보냈는가

태양 빛이 있어도 어두운 우주의 검은 색인 보이지 않는 푸르름에 갇힌 내게도 일탈의 무중력은 존재하리라.


▲ 겨울의 태양을 앙상한 가지가 가려주려 노력한다



▲ 옛집과 주인을 모를 자전거 한 대


▲ 눈이 온 한옥과 살아남은 식물


▲ 옛집의 변신, Cafe 시루 4294


▲ 실루엣에 숨은 새의 형상






고요하고 아늑한 아산 카페

CAFE 시루 4294

아산 카페, cafe in Asan, 牙山市 咖啡馆





▲ 시루 4294


아침에 눈을 뜨니 푸른 하늘이 상쾌하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인지 모르겠다. 하늘이 이렇게 맑고 깨끗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세상이다. 날씨는 춥지만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아산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에 들려 산책을 하고 주변에 있는 카페인 시루 4294에 들렸다. 전에 여름에 들려 멋진 분위기에 취했던 카페이다. 아산시 송악면의 시골마을에 위치한 고즈넉한 카페인데, 겨울에 오니 겨울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적한 시골의 한옥집



▲ ㅁ자형 구조의 옛집 카페





카페로 들어서며



50여년이 넘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곳인데, ㅁ자형 구조의 옛 집의 정서를 그대로 남겨두고 요즘의 느낌을 가미한 곳이다. 한옥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떠올리는 인테리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카페 시루의 입구


안채에 있는 카페




옛집을 개조한 실내


벽에는 집을 지탱하는 나무로 기둥들이 정겹게 남아있고, 드라이플라워, 도자기, 천 등 작고 아기자기한 물품이 진열되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시루4294's 메뉴





부드러운 카페라떼



커피는 직접 볶는 곳은 아니고, 리브레 원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스팀밀크의 입자가 곱고, 맛이 부드러워 맛이 좋았다. ^^ 여름에 아이스커피를 마셨을 때보다 오늘이 맛이 더 좋았다. 


▲ 생화와 같이 나온 라떼


▲ 밀크폼이 촘촘해 부드러웠던 라떼



마르게리따 피자



전에 왔을 때에는 프레즐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마르게리따 피자를 먹어보았다. 피자빵보다 약간 큰 사이즈로 그렇게 크지 않은데, 빵이 약간은 두꺼워서 피자라기 보다는 약간 두꺼운 피자빵의 느낌이다. 




겨울 그리고 사진







카페 시루4294


전화번호 : 041-549-4294

주 소 : 충남 아산시 송악면 강당리 88-9 (강당로119번길 11), 외암민속마을에서 차로 3분거리






▲ 길냥이, 순이



- 차가운 나날의 이방인 -


                             - Paul Yoon


외딴 돌계단의 주인 고양이 모르게 

하늘의 물 먹고 자란 흰 꽃송이

밤새 세상을 위로하는 꽃밭이 되었다.

 

해는 뜨고 외딴 돌계단의 이방인은

자연을 방황하던 길 고양이 쫓아버린 것은

위대한 영장류 직립보행인.

 

길 잃은 보행인 생각 없이 감히 한 발 들어

온돌방 뜨거워진 체온으로

하늘의 창조물을 부수는 악역에 만족한다.


순백한 꽃밭 거닐어 때 타기 쉬운 흰 수제 카펫을 만든다.

인공의 신(神)을 신고 자연의 창조물인 카펫을 밟는다.

작은 고양이 발자국이 그려질 공간은 없었던, 순결의 카펫.

 

옛 주인에게

신(神)의 꽃밭은 가혹한 시련.

이방인의 친절은 이기적인 공생.


- 2014年 겨울에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온통 하얗다. 정원의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습도가 높은 눈이 차곡히 쌓여, 가지보다 5배나 두꺼운 눈이 주객이 전도되어 마치 자신이 원래 나무이었던 것 처럼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한 결정의 차가운 눈 꽃이 세상을 덮었다.

오늘 따라 유독 차가운 돌계단에 쌓인 눈 때문인지 매일 아침 밥을 먹으러 찾아오는 길냥이 순이는 보이지 않는다. 

날이 추운 겨울은 음식물 쓰레기까지 얼어 길고양이에게느 혹독한 계절이다. 

그런데 추위가 순이를 막은 것이 아니었나보다. 흰 눈으로 된 땅에 어지럽게 생긴 고양이 발자국을 보니, 내가 문을 열어 놀란 순이가 도망을 갔나보다. 눈은 계속 내리고 고양이의 발자국은 점점 사라진다. 마치 내 주변으로 오지 않았던 것 처럼 금새 평평한 흰 바닥으로 변해버렸다.

추운 날씨에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따뜻한 바닥에 포근한 이불을 덮는다. 

아직 밖은 춥고,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나에게는 따뜻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날이다.




Seoul

Cheonggyecheon










AGFA PHOTO 200 vista plus



서울


청계천


빌딩 숲의 생명길이자, 과제의 길을 걷다.



 清溪川 



기다리고 있겠다고


▲ 나미나라 포스트, 남이섬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고,

단지 한 통의 편지를 받기 위하여 또 서있겠다고,

하지만 받고 나면, 어쩔거야?

이미 마음은 남의 나라에 가있는 걸...


變心




차 향기를 마시며

 


 

- 香 氣 -

 


                         - Paul Yoon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산봉우리

자신을 찾아보려 새로운 정신 찾아

시냇물 흘려 떠나 보낸다.

 
흙의 힘을 받아 한없이

떨어지고, 쏫아지고, 넘쳐흐르고,

애꿎은 구름 송이 원망한다.

 
낙원찾아 마땅히 돌아올

꿈의 여행자 기다리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받아들일 뿐인 것을

 
바다라는 큰 생명 찾아 떠난

목적의 방랑자 멀리화 향기 머금은

찻잔 속에 숨어버릴 것을

 
시내는 아직 흐르지 않았다.

시내는 단지 떨어질 뿐이다.

시내는 그저 담겨질 뿐이다.

 
인간의 냉정한 육체 속에

고귀한 영혼을 팔아버린다.

흐를 곳은 단 한곳 뿐

무덤이란 이름의 안식처

 
2010年, 초겨울에 觀音茶 한 잔 마시다가....

 

 

 

약간은 쌀쌀해진 초겨울 밤, 차가워진 발 끝을 녹이고 싶어 차를 준비했다.

발이 시려웠는데 발과 멀리 떨어진 입으로 들어가는 차를 찾으니 같은 몸이지만 참 먼곳의 매체를 찾아 나섰다는 생각이 든다.

 

철관음 이파리를 자사호에 넣고 뜨꺼운 물을 부었다.

맑은 물에서 차가 우러나고, 작은 공간은 차 향기로 충만해진다.

가득하던 차 향기는 찻잔에 담긴 찻물을 차가운 나의 몸에 넣으며 사라졌다.

차갑던 몸에 약간의 온기가 흐른다.

 

단순히 차를 마셨다.

그런데 기분 좋게 차를 마시고 나니, 문득 작은 찻잔에 담긴 차가 크게 느껴진다.

 

산 속의 작은 샘에서 맑은 물이 나와 계곡을 타고 낮고 낮은 바다를 향하여 흐르며 많이 더렵혀 졌다.

소수의 물이 바다에 모여 순화되다가 증발해 하늘에 모였지만, 중력의 제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대지를 지려밟는다.

비의 희생을 거름으로 자라난 녹음은 생명을 발하지만, 계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돌고 돌다 갖혀진 물과 초록의 생명이 인공을 더하여 새로운 창조물로 남아 내 앞에 놓인다.

오랜 여행을 마친 자연의 존재를 단순히 한 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

전혀 자연적이지 못한 나란 존재의 무덤 속으로 인도하였다.


육이 멈추고 영혼이 없는 분진으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때까지...

지긋 지긋한 자연의 순환에서 잠시 쉬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묘비명 같은 시 한 구절 남긴다.

 

 

 

 


▲ Starbucks in Naha, Okinawa


오늘은 주말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멍하게 있었던 때가 많았다. 움직여야지, 행동해야지 하는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맴돌고 몸으로 명령을 내리지는 못했다. 겨울이란 시간 속 공기의 차가움이 다가온 후에 추위가 싫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자 바로 온기가 찾아온다. 따뜻함에 정신을 놓은 것인지 추위와 단절된 몸을 질투하는 차가운 머리의 장난인지 망상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다른 세계에 도망갔다 돌아온 기분이다.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내 머리가 아닌 머리가 된 후에는 종잡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난 현실에 살고 있는데, 잠시 상상과 희망, 꿈속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찌 보면 무기력증이고 어찌 보면 나태함이 될 수도 있는 말 같다. 종종 멍하게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와 비슷한 상황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한다.

 

현실과 다른 상상의 공간에 빠지는 것은 비이상적인 느낌이지만, 남과 다른 나만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싫지는 않다. 어떨 때는 현실이 더 좋고, 어떨 때는 상상의 세상이 더 좋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좋다거나, 싫은 것은 없다. 현실에서는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에 대한 대가가 돌아온다. 좋은 결과 일 수도 있고, 나쁜 결과 일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미래가 보인다. 하지만 이상 속에서는 한 없이 즐거운 방황 속에 내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원래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이 펼쳐지면 좋을 것도 같지만, 의외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뜬 구름 같은 느낌에 호감이 간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 속 시간은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여 곧장 현실을 바라볼 때가 많다. 잠시 상상 속에 즐거워하다 현실로 돌아오는 허무함 속에서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잠시 꿈과 현실에 경계에서 하루만 잠시 늘어져 있다가 다시 시작해야겠다.





계절은 언제나 돌고 돌아


▲ 해지는 시간, 제주 용눈이 오름에서




- 매미의 코스모스 -


                           - Paul Yoon

 

가을의 밤,

떨어지던 마른 잎사귀에 눈을 잃어

보지 못했던 아니 보지 않았던

이별의 데생, 그렇게

 

겨울의 새벽,

얼어가던 심장의 눈물에 마음을 잃어

보내지 못했던 아니 보내지 않았던

그리움의 족쇄, 어느덧

 

봄의 아침,

두근두근 그윽한 향기에 마음을 열어

잊고 싶었던 차마 잊지 못했던

사랑의 굴레, 그리고

 

여름의 낮,

화려한 꽃 잎에 눈을 열어

보기 싫었던 그래 보고 싶었던

추억의 유화, 이제는

 

어설픈 성충 놀이

건조한 껍질 벗어 투명한 날개 들어

보지 못했던 아직 보내지 못했던

마음의 소리, 하늘에 연주하리라!

 

미증유의 참사 속

동백꽃 만개한 작은 섬 그늘 삼아

잊지 못했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욕망의 샘물, 바다에 흘려보내리라!


- 2010年 7月 23日



1년이란 시간을 계산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겹게 순환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 반복을 견디다보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생각하는 존재의 마지막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가을이 되면 生命의 기운이 사그라든다. 푸르던 잎은 마지막에 붉게 타오르다 소멸한다.

겨울이 오면 새로운 生命을 위해 깊게 웅크려 忍苦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음을 설레이는 봄이와 여름에는 푸르름이 충만하다.


또 다시 가을이 되면, 또 다시 겨울이 오면, 그리고 봄이 되고, 여름이다.

그렇게 시간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고, 여름 내내 시끄럽게 울어데던 매미는 번데기로 忍苦의 시간을 보내 마침내 하늘을 난다.


마치 질서정연한 우주의 코스모스를 담은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를 이해하기에 나의 정신은 너무 가냘프고 내의 육체는 너무 하찮다.


Cosmos in Season




, 사람


▲ 중국 길림성 길림시 북산공원에서


지금도 쓰는 표현 중에 하나이겠지만,

나라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는 동안에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많아지는 모습을 "벌집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의 생활을 벌에 비교하여 안쓰러워하는 심정은 이해가 가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그런 생각 자체를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지금 벌집 안에서 사진에 있는 벌집을 보며 상기하는 표현일 뿐이다.

콘크리트에 구멍 뽕뽕 뚫어는 있지만, 그 속은 따뜻하고, 경치도 좋다.

층간 다툼도 있고, 관리단의 불화도 있어 싫다.

꿀도 있고, 침도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벌들아!

이제는 지구를 점령한 것이 인간이니, 벌집이란 말은 인간에게 주어야 하지 않겠니?

거꾸로 벌집을 "사람 아파트 같다." 라고 표현할게.




순간의 하루

 

 

해가 지고 창을 닫아 모든 하루가 끝이라 생각했지만,

상념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이란 시간은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


창을 닫고 끝에 있을 것인가

창을 열고 시작에 있을 것인가


사람은

무한의 선택을 하며 지금도 흐르고 있는 순간의 하루를 보내야 한다.


단지 잠 못드는 밤,


▲ 동인천 홍예문


텅 빈 방에 누워 잠이 오지 않아 어두운 공기를 느끼며 멀뚱멀뚱

보이지 않는 천장만을 바라본다.

 

잠이 오지 않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왜 이렇게 잠 못 드는 것인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들로 머리 속은 잠식되어 간다.

 

그러다 문듯 이것이 왜 잘못된 상황이라 여기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나 하나뿐...

 

잠이 든 사람은 잠이든 채로,

새벽 공기를 마시는 사람은 차가움을 아는채로,

잠들지 못한 사람들은 나와 같은 동지로,

그렇게 사는 것인데

 

무엇이 잘못이라고 걱정하며

단지 잠 못 드는 자신을 탓하고 있던 것인지...

 

왜 걱정하는 것인지...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그냥 자연스럽게 가는대로 가면 될 것을...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켜 불을 켜고

되레 커피를 한 잔 마신다.

 

그걸로 됐다.

나의 새벽은...


失眠症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 군포시 지금은 사라진 공장 주변에서


해는 제자리에서 여지없이 뜨고 지어, 세상에 한해라는 기준을 만들어 사람들을 인도한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만든 시간의 연속 속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아 세상을 여행한다.

숨 한번 내쉬고, 길을 나선다.

 

인공에 의한 길과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의 연속에서 소중한 가치의 존재 하나 지나간다.

스쳐 지나가는 서로의 상대성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단지 한번의 걸음으로도 의미 없는 거대한 만남의 순간이 사라져 간다.

 

인생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 한 사람의 영혼이 되어 주변을 바라본다.

누군가가 곁을 지나친다. 모르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멀어진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 멈추어진 길 위에서 지나치는 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는 소중하다. 비록 그저 스쳐지나가 알 수 없는 존재이지만 잠시의 순간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길을 걷는다. 해가 뜨고 해가 져도 어딘가로 떠난다.

모두가 대지 속으로 돌아갈 때에 다시 만나 스쳐지나 갔던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다.


Moment


내려갈 수 있을까?

 


 

높다고 생각되지만 높지 않은 2층, 사다리 같은 계단 9개 앞에 멈추어있다.

과연 이곳을 내려가는 것은 평범한 일상의 하나일까?

하지만 앞을 막는 철조물은 아직 한걸음을 들지 못하게 한다.

아니. 스스로 두려움에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I can, But i c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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