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

 

 

China Jilin Tumen

 

이리저리 꿈을 꾸다 잊어버린 현실의 세계를 찾아보려, 다시 정신없이 살아가다 잊어버린 꿈의 세계 또한 잊어버렸다.

이상과 같은 현실을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혜택된 것일까?

꿈과 현실을 잊고 있는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지, 꿈을 위해 현실을 살아야하는지, 현실을 위해 꿈은 숨겨둬야 하는 지,

형이상학을 지우개로 풀려하는 나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형이하학을 도피처로 생각하는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정상과 비정상속에 스스로에게 정상이되고픈, 비정상적인 '我'이지 않는가!

답이 없는 이 비정상은 스스로에게 완벽하지만 아직은 인정 받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개성을 열심히 지워 다시 백지로 돌아가는 순간에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도피처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뿌리쳤을 때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타인에게 시선을 받기 위하여 오른손을 들어 수많은 낙서를 지울때도, 왼발을 들어 달아나야 하는 때도, 아직은 아니다.

길이 끝나는 곳이라고 생각되던 곳에는 다른 문이 있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문을 지나지 못하는 곳이라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리 넓게 열려있는데도 말이다.


홀로 정체된



두만강



연변을 떠나온지 벌써 강산이 변한다는 10여년의 세월이 거의 흘렀건만, 


아직도 나의 마음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보다.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준 한번의 과정이 있었던 장소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삶에 대한 길을 알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선택 때문에 삶은 더욱 힘들어 졌고, 점점 구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아무리 현실은 힘들어도 내게 준 정신적인 가치는 평생을 지탱해 줄 수 있기에 뜻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왔건만 10년 전 그 시간에 아직도 정체 되어있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마치 10년이란 시간이 증발해 버린 것 같다. 


저 사진을 찍은 것도 내년이면 딱 10년이 된다. 요즘 다시 저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10년에 강산은 말로 변한다하지만 아마도 나처럼 사진 속의 공간은 변한 것이 없을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에 중국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다음에는 꼭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을 지나 연변에 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아직도 그 소망은 머나먼 이야기 같다.


지금은 나의 소망도 희석되어 내가 저곳에서 딱히 다시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단순히 떠오르는 것을 말하자면, 오염 되어 있었던 두만강이 다시 푸른 물이 되었으면 하는 것 정도이다.


오랜 시간은 지났지만 어떤 면에서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은 많다.


하루 하루가 다람쥐 챗바퀴 돌듯 반복되듯이, 나의 삶은 제자리이고 한반도의 모습도 그대로이다.





색을 받는 시간




시커먼 건물의 안쪽에는 어둠만이 존재한다.


녹이슨 작은 문을 밀어보니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온다.


어둠의 공간은 쉽게 빛에 정복되어 색을 찾아 간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나 또한 나의 색을 찾아 간다.




투과하다





불투명한 창을 희미하게 지나치는 빛은... 


고달픈 여행을 위해 어둠으로 온 것일까


만연한 어둠을 밝히기 위한 희생일까




透 過




홀로서기



잠시 지쳤다고, 조금만 쉬고 싶다고, 

아니 이제 됐다고, 모두 필요 없다고, 그저 내버려두라고.

이런 말을 수없이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이런 저런 신세 한탄 한번쯤 펑펑 울며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줄 이가 없다.

단지 자아라는 몹쓸 추상적인 한 사람뿐 이었다.

그걸로 됐다.

잠시 딱딱한 의자에 앉아, 한숨 한번 깊게 쉬고, 

무거워진 두 다리에 기대어, 너무나 가벼워진 몸을 일으킬 수밖에...

그걸로 됐다.

아직 너는 숨쉴 수 있고, 아직 너는 설 수 있다.




내가 아닌 나




누군가가 결혼에 대해 사과 하나를 놓고 반으로 자른 후 다시 붙이며 

'원래 하나인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반 쪽은 본디 당신이었던 것인가요?

남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될 사랑을 하고 있나요?



변형된 돌


청담동 한 건물 벽의 조각



늘 같은 곳에 무엇을 바라 보느냐? 

돌로된 나무, 돌로된 산 옆에 두고, 돌로된 사람이여!

이미 세상은 너의 일부가 되어 버렸나 보다. 

네가 있는 곳이 바로 너의 중심부.

큰 빌딩과 넓은 아스팔트, 이 거대한 도시의 주인은 

바로 돌의 주인인 너였구나!

생명을 넣어 주마, 만약, 만약, 세상이 사라진다면, 

그 다음에 다시 진정한 네 모습을 찾아보자구나.



여행을 기다리는 빈자리


바다 한 가운데 객실에서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추운 겨울에 한 꽤 오랜시간을 배낭여행으로 다녀왔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한국을 떠나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배가 하도 흔들려 갑판에 나가보니,

칠흑 같은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거친 바람으로 인한 공포감과 바다 위로 내리는 눈의 황홀함이 동시에 찾아왔지만,

동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멀미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배에서 내려 바로 심한 감기에 걸려 여행 첫날은 숙소에 혼자 누워 고생한 기억이 납다.

그러고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무작정 도착하여 길을 헤매고,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것들을 먹어대고,

너무나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할 수 있었다.


요즘은 그때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훌쩍 어딘가로 떠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제 각각의 생활로 바쁜 친구들과 함께 갈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 든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마치며 돌아오는 객실 안의 테이블.

사람은 어느덧 떠나고, 여권과 티켓만이 남아 언제 올지 모를 다음을 기약한다.

이제는 혼자 어딘가로 훌쩍 떠나야겠다.

추억은 가슴 속에 묻어 두고, 함께 여행할 누군가를 위한 기다림의 여행을 떠나야겠다. 



국경이 무엇인지


중국 도문시와 북한의 남양시를 연결하는 다리



주말이 되어 단조로운 일상을 깨고자 친구들과 연길에서 가까운 도문시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도문시는 두만강이 흐르는 작은 도시로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도문에 가보면 중조국경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한국에서는 남한과 북한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북한이란 말은 쓰지 않고, 조선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의 서점에서 파는 지도를 사서 보면 모두 북한은 '조선', 남한은 '한국'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어찌보면 이제는 점점 한반도는 한 국가가 아닌 다른 두 나라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한반도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너무나 닮게 생긴 한 민족인데 말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모두 같지만, 마음속에 숨어 있는 정은 있지만, 권력과 아집이 모여, 이데올로기라는 껍데기를 쓰고,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를 넘어 간도에는 조선족이라 불리우는 민족이 있다. 

그들은 또 한국도 조선도 아닌 중국에서 중국의 인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조선족이라는 명칭 때문인지, 한국인도 아닌 중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다. 

또한 한족과 소수민족과의 차이가 있듯, 중국 내에서도 그리 대접을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는 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에도 많은 한족들이 뿌리를 내려 누가 조선족이고 누가 한족인지 구분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단지 소수민족의 보호를 위해 상점에 내놓은 간판에 한글이 적혀있는 것을 보며 이곳이 조선족들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연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중국속의 작은 한국 같다. 

중국에서도 인터넷 속도가 연길만한 곳이 없고 24시간 PC방과 노래방, 찜질방이 운영되고 있다. 

상점들도 늦은 시간까지 장사를 하며 부지런하고 근면한 민족의 습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더덕무침, 설렁탕, 비빔밥, 파전, 냉면 등 한식은 한국에서보다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한국에서 나오는 드라마와 음악,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한국에서 온 저보다도 빨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미용실, 식당, 숙박업 등을 열며 더욱 한국의 문화를 그대로 심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벽시장의 모습과 사람들과의 삶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외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작은 기숙사 방 안에 누워 있는데, 조선족 후배가 들어오는데 그 친구는 성이 '김'씨였다. 

어디 김씨인지가 갑자기 궁금해 물어 보았다. 

과연 조선족들은 본관이 있을까, 그리고 그곳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이였다. 

그 친구는 너무나도 자주 듣던 말을 했다. 

"김해 김씨 입니다." 

그 옆에 있는 친구에게 또 물어보니 역시나 너무 익숙한 말이었다. 

다른 친구는 '파평 윤씨'라고 한다. 

연길에 와서 늘 스스럼없이 친근하게 지내던 친구들이지만, 나는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이라는 느낌을 스스로도 가지고 있던 때에, 

이미 예상은 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익숙한 본관을 듣고 나니, 

'저들이 나와 오랜 세월 전에 태어났다면 돌아갈 곳이 아닌 바로 이웃에 살고 있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곳 간도라는 곳은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고통에 못이겨 한반도를 떠나 잠시 장소를 옮긴 바로 이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조선족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만주와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피를 흘리던 사람들의 후예였다. 

그들과 함께 일송정에 올라 해란강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윤동주 시인이 어린 시절 살던 집 뒤편에 있는 모래판에서 씨름도 했다. 

그들과 술을 마시며, 축구를 하고, 여행을 가고,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저를 이방인이 아닌 친구로 대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작은 연못을 보았다. 

그 연못을 보고 있자니, 두만강이 생각난다. 

멀리 간도에서 두만강을 보았을 때에는 한반도의 남쪽 끝이 멀지 않다 느껴졌는데, 

한국의 작은 연못을 보고있으니 한반도의 북쪽 끝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마치 저 연못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연꽃들의 삶이 우리 민족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겠지.


추억의 공간은


YUST '낮은음자리'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이 생각하는 소중한 추억의 공간이 한 곳 쯤은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을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퍼지고 옛 추억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행복한 곳이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그때가 다시 한 번 떠오른다. 나에도 그런 공간이 있고, 쉽게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YUST 대학 안에 위치한 카페인 '낮은음자리'라는 곳이다. 어찌보면 저곳이 모든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버린 곳이다. 생각과 성격, 가치관, 인생에 대한 추구 등 모든 것에 영향을 준 곳이었다. 하지만 처음 그곳에 가게 된 것은 의도하지는 않았다.


군대를 전역하고 다가온 학기에 수업을 듣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학교에서 외국에 보내주는 많은 제도가 있는데, 왜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과 자체에서도 일본에 보내주는 것이 있었고, 그 말씀을 하실 때에는 학교의 국제교류원 측에서 영어권과 중국, 일본으로 보내는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었다. 영어도 엄청 못하고, 중국어와 일본어는 도통 모르던 나에게 그런 것은 좀 동떨어진 이야기 같았다. 그렇지만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무언가를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에 왠지 모르게 이끌리는 심정이 생겨나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이 원서를 내보았다. 믿을 만한 것은 거창하게 쓴 자기소개서와 꽤나 잘 관리했던 학점뿐이었다. 교수님 추천서, 학과장님 추천서도 힘들게 받고, 절차를 거쳐 마지막으로 면접을 보았다. 그것도 마지막의 순서로 면접을 보러 들어가니 함께 들어간 사람들은 왜이리 말들을 잘하는지, 감탄을 하며 어떤 말들에 대해 답을 하고 나온 것은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을 할 때에 생각치도 않게 되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간 국제교류원에는 재미있게도 마지막에 면접을 들어간 4명이 그대로 마지막 면접에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같이 선발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들도 '저 사람들은 뭐 길래 저리 말을 잘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도 실수한 것 같을 때 안 되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낯선 외국 땅에서의 삶이 시작되고, 그전에 살아오던 모든 과거를 잊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게 된 학교는 시설은 미약했지만, 교육이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곳이었다. 교수님들은 학교 안에서 생활을 함께하며 학생들을 지도하고, 밤에도 학교 안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이 있으면 자연스레 옆자리를 차지하고 또 다른 배움이 시작되었다. 수업은 거의 발표와 토론, 실습으로 이루어지고, 수업을 하고 있으면서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친한 교수님의 가족과는 함께 한적한 시골로 MT를 가고, 젊은 교수님과는 농구를 함께 즐기며,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애정으로 넘쳐났다. 


한번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학교 앞 황폐한 곳에 나이가 지극하신 교수님과 함께 코스모스를 심은 기억도 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기숙사에서의 룸메이트들과의 만남, 교수님과의 약속, 한국 학생들과의 모임, 과수업을 위한 모임, 조별 모임, 현지 사람들과의 조우 등 늘 쉴 틈 없이 계획이 잡혔고, 거의 3달 정도의 스케줄이 미리 잡힌 생활을 하였다. 한국에서의 늘 반복되는 생활 속에 틀에 박혀있던 인생은 점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인도해 주었다.  


그렇게 좋은 기억과 영향을 준 학교의 장소 중에서도 바로 사진에 있는 장소가 기억이 난다. 학교 안에 있는 카페인데, 돈은 대충 지불하고 자신이 커피를 타마시고, 도넛이나 샌드위치는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하루의 시작은 늘 저곳에서 부터였다. 공부도 만남도 휴식도 대화도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곳이다. 언제든지 저곳에 들리면 친구들이 앉아 있었고 환한 미소로 대해 주었다. 어쩌다 친구가 없으면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고, 친구들과 준비한 공연도 하며, 재미있는 노래자랑도 즐기던 곳이다. 그리 편안한 의자도 아니었고, 그리 맛있는 커피는 아니였지만, 타국에서의 생활에 안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오래 흘렀지만, 왠지 지금도 저곳의 문을 열면 아무런 걱정도 없고, 슬픔도 없고, 단순하며, 순수하게 저를 대해주던 친구가 웃으며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소중한 추억의 공간은 어느 곳인가? 

생각만해도 자연스레 미소가 퍼지는 그곳. 잠시 생각하며 지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잠시 뒤돌아 즐거운 공간과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행복한 오늘을 살기위해서 말이다.




북망산 하늘


중국 길림성 연길시 북망산의 하늘




떠나간 이들을 위한 하늘인가,,

살아갈 이들을 위한 하늘인가,,

그저 욕망을 숨기기에 좋은 하늘이구나,,





터널 속 흔들림





지금 가고 있는 인생의 길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는 生이란 주어짐 속에...

 

무엇에 이끌려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자는 반복 속에...

 

어느 하나 맞는 것이 있는지 모르고 살 수밖에 없다.

 

 

 

단 한번의 탄생과 단 한번의 죽음 사이에

 

수많은 행복과 고통, 슬픔을 오가는 복잡한 존재로

 

불려지는 명패하나 달고 인생의 길을 걷다가

 

마지막 빛 한 번 보고 후회치 않으면 다행이리...

 

 

 

猶豫


혼자가 아니야


백두산 달문 내려가는 절벽에 핀 야생화

 

  

꽃아, 몇해를 피고 지었니?

거친 화산재 옆에서, 아찔한 절벽 옆에서 오랜 세월 피고 지었겠지?

마치 우리 민족처럼 큰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날 수 있겠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꽃아, 몇 해를 피고 지겠니?

맑은 천지 옆에서, 차가운 만년설 옆에서 또 숨쉬며 피고 있겠지?

하지만 우리 민족보다 네가 더욱 부러운 것은 남아 있단다.

둘이 아니라는 것....

를 기다리는 시간




구름이 많아지고, 세상이 어두워지며,

잡고 있을 빨래는 떠나갔다.

 

다른 빨래집게도 다 떠나갔는데

혼자 남아 비를 기리고 있는 것은

너 또한 나처럼 혼자 비를 맞고 싶어서 인거니,

 

잠깐만이야,

잠시 비와 함께 흠뻑 젖어

아픔, 슬픔, 외로움, 절망 모두 씻고,

 

또 당연하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오자.





고요한 시간 두만강을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련만,

눈앞에 보이는 강 넘어는 너무 가깝지만, 아직은 건널 수가 없었다.

한번 눈을 뜨고 한번 눈을 감는 쉬운 세상 속에

우리는 스스로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돌리면 비워질 이상(異常)



어스프레한 한 칸의 방 안 

어디선가 들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며 

당신은 어떤 하루를 기록하려 하는 가.


지겹게도 다가오는 반복적인 하루와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즐길 준비는 되어 있는가.


위에서 한없이 아래로 채움을 이어가는 

모래시계의 윗 공간처럼 

텅빈 가슴으로 살아갈 것인가.


쓸모 없는 의미라도 담은 

자신만의 고유한 명사가 되어 


자신을 채워가는 

모래시계의 아래 어딘가처럼 

받아들이고 

다시 비워가는 EGO로 살것인가.


다 내려가버린 모래시계를 

돌리는 손은 자신의 의지이기에...


스스로의 답을 찾아 

위와 아래를 돌리다보면 


수많은 반복 속에 자신을 닮은 모래알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像沙粒一样

 



느리게 보여도 절망하지 말라


성공회의 예수상


"내가 계획한 일들은 바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전이 실현되는 시간은 천천히, 꾸준히, 확실하게 다가온다. 

 느리게 보여도 절망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이 확실하게 이루어 질 것이다.

 인내하라!

 단 하루도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합 2:3,LB)


태어나고, 아이답게 즐기고, 학교에 들어가고,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가지고, 성장할 곳이 없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테두리에 갇혀 살아가고 있을까.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테두리 속에 또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을까.

모두 같은 틀에 갇혀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길과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꿈꾸는 그 열정의 순간에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열정이 타고 타다 점점 희망의 땔감이 모자라질 때에, 다시 일상의 테두리로 돌아간다.

그후 테두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마치 어두운 밤, 길을 모르는 산 속에서 마을을 찾기위해 방황하지만, 

계속 같은 곳을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과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마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있다. 

아직 자신도 모르는 땔감은 남아 있다. 아직 우리는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은 지구의 작은 산이 아니라 태양일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뜨거운 존재일 것이다.

인내하자!

계획한 일들이 비록 일어나지 않을 지라도.

자신의 삶을 천천히, 꾸준히, 확실히 만들어간다면, 느림과 정체는 문제되지 않으리라.

오늘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은 비록 어제 걸었던 길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고무나무에 매달린 물방울


나의 집 정원, 고무나무에 매달린 빗방울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아침을 느끼고 싶기에는 저 빗소리가 너무 기쁘다.

귓가에 소근 소근 마음을 가라앉게 해준다. 

왜 이렇게 비만 오면, 이불 속은 따뜻한 것인지...

훌쩍 털어버리고 싶지만 늘 부지런함과의 싸움에선 지는 쪽인가 보다.

하루를 돌이켜 보며, 그 싸움에서 이긴적은 몇 번 있을까?

공부와 놀이, 잠과 깸, 휴식과 일, 만남과 고독 이런 것들의 연속에서

하루를 보내며, 또 내일을 기약하고 또 다음을 바라며, 순간을 안주한다.

잠시 마음을 놓고 살면, 인생에 주어진 목적이 멀어진다.

그걸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래서 더욱 무언가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데,

내일 세상을 떠나도 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세상을 보내고 돌아왔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하는데,

과연 될까?

갑자기 번잡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고마운 빗소리가 고민의 빗소리로 바뀌었다.

아마도 하루이니, 기약이니, 이런 저런 물음 들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함정인가 보다.

오늘도 비는 늘 내리던 것처럼 변함없이 내릴 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자신'이라는 것 하나가 남게 되는 것 같다.

별것도 아닌 것에 고민하고 기뻐하는 인생에 후회는 없다. 

단지 그런 고민에 기쁨을 잃음에 반성할 뿐이다. 

아쉬운 것 또 반성하고 미래의 길을 위해 노력을 해보아야 겠다.

저 빗방울도 다시 대지로 바다로 하늘로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비에 그만 취하고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 보자.

다시 비가 오는 아침에 빗소리에 기뻐하는 날을 기다려보자.






하늘 아래



공 하나 던저보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잡념 하나 던져놓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복잡해져 누워 하늘을 보니, 

정답은 바로 저 하늘위에 있었다.


모든 혼동의 시작은 바로 저 하늘,

모든 혼동의 끝은 바로 저 하늘!





바라기, 바라기



해가 뜬 대낮에 해바라기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해를 바라보는 것이 해바라기가 아니었나?

해바라기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하여 서있게 되었다.

해바라기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의 발걸음을 들어, 나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보고 있다.

해바라기는 누구에게나 바라보게 해줄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잊고 있던 소중한 존재가 나를 바라보고 있겠지...

아직 세상은 혼자가 아니니 말이다.




사라진 들꽃, 野花





잎이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 들꽃...

그러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 해가 지나고, 다시 봄은 왔지만, 넌 자취를 감추웠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존재만이 사는 공간이 있다면,

내가 널 그곳에 보내지 않으리라.




Wild Flower



추구사이




누군가는 아래를 바라보고, 누군가는 위를 바라본다.

아래의 누구는 그곳만의 희망을 갖고,

위의 누구는 그곳만의 사랑을 갖는다.

너무 미천한 나는 그저 그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추억의 붕어빵




시장 한켠에 고소한 붕어빵 냄새 바람을 타고 물결친다.

코가 먼저 눈이 다음에 붕어빵을 따라 추억이라는 시간으로 떠나간다.

따뜻한 붕어빵과 웃고, 즐기던 시간들,

이미 간식을 넘어 우리의 소중한 樂의 매개체가 되었다.




사슴 눈망울



사슴아, 너의 깊은 눈망울 속에는 가식이란 찾아볼 수가 없구나

단지 먹고, 뛰고, 자고 어느 본능에 맡겨 지금의 순간ㅇ르 보내고 있구나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많은 생각을 한단다.


사슴이라는 객체에 대해서도

너에 대한 보존을, 너에 대한 가치를, 너에 대한 이익을, 너의 존재 자체를,

사람들은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생각을 가지며 살아간단다.


물론 잠시 그러지 않을 때도 있어

바로 이 순간

너의 깊은 눈을 바로보고 있는 지금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단다.




비상을 꿈꾸며


인천 월미도 앞 바다에서



네 이름이 조나단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어,

아마도 네게는 이름이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게도 너만의 꿈은 있겠지?

대기권을 넘어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갈 수 있는 꿈의 공간은 

누구에게나 주워진 특권이겠지?


내 마음까지 함께 가지고 

저 멀리 떠나가 주렴,

한낱 갈매기야, 


한낱 인간의 꿈을 꾸게 해다오.





대륙기차에서


2003年, 중국 베이징 서역에서 서안으로 가는 기차


여행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일과 생각하지 못한 추억도 생겨난다. 중국여행을 하며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달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중국의 기차를 타본 것은 2003년 노동절 기간에 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있는 연길에서 친구가 사는 길림시에 가기위해 잉워를 타본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중국의 기차는 '루완워'라는 4인실 침대칸과 '잉워'라는 6인 3층 침대가 나열되어 있는 종류의 침대칸이 있고, '잉쭤'라는 좀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칸이 있었다. 


처음 탄 기차는 잉워를 타고 8시간 정도를 달린 것인데, 밤에 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렸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다며, 한국에는 없는 침대칸 기차를 타는 것이 신기했다. 기차를 타니 그 칸을 담당하는 역무원이 와서 표를 달라고 한다. 왜 표를 달라고 하는지 모르고, 그냥 확인차원에서 달라고 하는가 보다 하며, 표를 주니, 표는 가져가고 금속으로된 표로 바꿔주었다. 나중에 내릴 때 알게 된 것인데, 오랜 시간을 가다보니, 자는 사람도 있고 해서 내리는 시간에 다시와 그 금속으로 된 것을 다시 가져다 주며 깨워주기도 하고, 다음 역이 내리는 곳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상당히 좋았다. 친구들끼리 수다도 떨며 잠이 들고 다음날 새벽에 길림에 도착하여 처음의 기차 여행을 마쳤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탔던 기차는 여름에 연길에서 북경에 가는 기차를 타고 20시간 정도를 갔다. 그때에도 잉워를 타고 갔는데, 잠자기 전에 보았던, 옥수수 밭의 풍경이 자고 일어나도 똑같은 옥수수 밭이기에 도대체 얼마나 옥수수를 키우는 곳이 넓은지 의아해 했다. 거의 대부분 잉워를 타고 이동을 했던 것 같다. 기차 안에는 생각보다 외국인이 없었다. 외국인인 저에게 여행 중이냐며 말을 붙이는 사람도 있고, 기차 안의 중국사람과 함께 음식도 먹고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데 북경의 서역에서 장안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바로 옆 침대에 외국인 배낭여행객이 있었는데, 여자의 키가 너무 커서 침대 밖으로 하얀 발이 뛰어나온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하얀 발의 발바닥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 새까만 것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크게 웃지는 못하고 작게 큭큭 거리던 것이 기억이 난다. 


북경의 서역은 2003년 서안에 갈 때와 2004년 낙양에 갈 때 두번 이용을 해보았는데, 북경역보다 세련되고 좋았다. 북경과 낙양은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8시간 정도는 간 것 같다. 중국의 기차를 탈 때마다 장기간을 움직이다보니, 기차에 타기 전에 먹을 것을 잔득 사서, 들어가곤 한다. 기차 안에서 음식 카트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잠시 멈추는 역의 플랫폼에 라면이나 밥과 도시락 같은 것을 팔고 있기는 한데, 플랫폼에서 파는 것은 멀리에 있으면, 기차가 출발해버릴까봐 조마조마 하며 빨리 달려가 음식을 사오기도 했다. 식사로는 라면과 도시락 그리고 미리 사가지고 온 버거를 먹거나 했다. 음식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해도 하루 정도를 기차 안에 있으면, 상당히 지루하기는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빨리 시간이 지나간다. 한국에서는 3시간 정도만 기차를 타고 가도 너무 지루하고 시간이 왜 이리 가지 않는가 하며 답답한 마음도 많았는데, 중국에서 기차를 차며 내리기 5시간 정도가 되었을 때에 내릴 때가 다되었다며, 짐을 정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었던 때도 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타본 것은 계림과 장안을 이동할 때 걸린 28시간 이었다. 밤 11시에 기차를 타고 하루를 기차에서 보낸 후 다음날 새벽 1시에 기차에서 내렸다. 하도 오래 가다보니, 밤에 잘때에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쪽으로 달리던 것이, 아침에 눈을 뜨니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고 일어나니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며 혼자 마음을 쓸어 내렸다. 그렇게 놀라며 갔던 계림에서는 새벽에 비가 부슬부슬 내려와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갑자기 쓸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즐거움이 더한 시간이었다. 


그런 즐거움은 기차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쑤저우에서 청도로 가는 기차에서는 귀여운 꼬마아이와 친해져 함께 놀기도 하고, 한 번은 역무원과 친해져 함께 사진도 찍고 그랬다. 그 역무원은 처음에 중국말을 못하는 줄알고 있었는데, 통로를 청소하며 오던 역무원이 책을 읽고 있던 제 근처까지 오기에 쓰레기가 없다고 말을 하니, 10시간 정도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중국말을 해서인지, "뭐야~ 중국말을 할 줄 알잖아~" 하며 꿍얼거리며 가기도 했다. 그 역무원은 다른 칸에도 한국인이 있다며, 갑자기 그 한국분을 소개시켜주어 내려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잉워를 타고 다니며 있던 일들이었는데, 잉워 말고도 루완워와 잉쭤도 모두 타보았다. 루완워는 상당히 아늑하고 좋은 4인실 침대칸이다. 누을 수 있는 공간도 넓은 편이고, 조용하고 더 깨끗해서 좋았다. 그리고 다른 독특한 기차로는 항주에서 상해로 가는 기차는 약간 빠른 의자칸 기차였는데, 기차가 2층이었다. 2층 버스는 타본 적이 있는데, 2층 기차는 처음 타보아서 신기했다. 중국의 가장 발전된 도시인 상하이로 가는 기차라 그런지 상당히 깨끗한 기차였다. 


가장 타기 힘튼 기차는 바로 잉쭤라는 자리이다. 잉쭤는 한국의 예전 통일호를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습다. 약간은 딱딱한 의자칸인데, 그런 기차칸을 타고 톈진에서 연길까지 18시간 정도를 타고 갔다. 잉쭤를 탄 것은 다른 표를 구할 수가 없어서 타게 되긴 했지만, 그때의 동행과 나중에 창가쪽 자리를 바꿔가며 앉아가기로 하고 탔었다. 심양까지가면 자리를 바꾸기로 했는데, 끝까지 바꿔주지 않는 친한 형님을 보며 구박을 했다. 잉쭤의 자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말고도 입석처럼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그 수가 많다. 의자 밑에 누워서 가는 사람도 있고, 내 다리 바로 앞에 쪼그려 앉은 사람도 있어서 다리를 10시간 정도 펴지도 못하고 갔다. 화장실을 쓰는 사람도 많아 한참을 기다려 들어가기도 했다. 연길로 가는 기차이다보니, 조선족들이 기차안에 있어 말이 편하게 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두산을 여행하려고 기차에 탄 한국인 여자 두 분도 같은 칸에 있어서 이야기도 하고 했다.


이런 저런 중국의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지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북한의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톈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 있는 분이 뭐라고 말을 건다. 중국어도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못 알아들었다. 중국에 있은 지 오래 되어서 한국말과 비슷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못 알아 들었던 것이었다. 다시 잘 들어보니 한국말이기는 한데, 좀 억양이 이상했다.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해주고, 기차를 탔더니, 그 할아버지도 같은 기차칸에 계셨다. 역에서 대화를 한번 해서인지, 말을 먼저 붙여오셨다.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명태를 팔기위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국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왕래를 하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찰라에 할아버지께서 내게 물어본다. 한국에서는 '아버지'를 뭐라고 부르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한국에서도 '아버지'라고 합니다." 라고 답을 했더니 또 물어보신다. 그럼 한국에서는 '친구'를 뭐라 부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국에서도 친구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며, 옆에 앉아있는 중국사람에게 중국말로 이야기를 한다. 자기가 쓰는 말과 한국에서 쓰는 말이 같다며 중국인에게 말을 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어떤 의미의 웃음이었는지, 알듯 모르듯 묘한 감정이 제게도 찾아왔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니, 한국의 분단 상황이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을 벗어나, 정치와 권력인 소수를 위한 분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분단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남한과 북한의 대립관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전에도 통일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말을 쓰며 수 천년을 함께 보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 반백년이 조금 넘은 우리 민족에게 이별은 긴 시간만은 아닌 것 같다. 기차를 타고 간도 지역으로 향하며, 언젠가 삶이 끝나기 전에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이 대륙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기약했다. 


과연 그런 날은 올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겠다고


▲ 나미나라 포스트, 남이섬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고,

단지 한 통의 편지를 받기 위하여 또 서있겠다고,

하지만 받고 나면, 어쩔거야?

이미 마음은 남의 나라에 가있는 걸...


變心




, 사람


▲ 중국 길림성 길림시 북산공원에서


지금도 쓰는 표현 중에 하나이겠지만,

나라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는 동안에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많아지는 모습을 "벌집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의 생활을 벌에 비교하여 안쓰러워하는 심정은 이해가 가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그런 생각 자체를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지금 벌집 안에서 사진에 있는 벌집을 보며 상기하는 표현일 뿐이다.

콘크리트에 구멍 뽕뽕 뚫어는 있지만, 그 속은 따뜻하고, 경치도 좋다.

층간 다툼도 있고, 관리단의 불화도 있어 싫다.

꿀도 있고, 침도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벌들아!

이제는 지구를 점령한 것이 인간이니, 벌집이란 말은 인간에게 주어야 하지 않겠니?

거꾸로 벌집을 "사람 아파트 같다." 라고 표현할게.




내려갈 수 있을까?

 


 

높다고 생각되지만 높지 않은 2층, 사다리 같은 계단 9개 앞에 멈추어있다.

과연 이곳을 내려가는 것은 평범한 일상의 하나일까?

하지만 앞을 막는 철조물은 아직 한걸음을 들지 못하게 한다.

아니. 스스로 두려움에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I can, But i c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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