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하버드에서 회계사까지

 

萬 行


현각

 


 

▲ Coffee & Book

 

 

걷고 이야기하고 먹고 차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시장에 가는 모든 것.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시끄러운 자동차소리를 듣고 

친구와 악수를 하면서 감촉을 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수행이며 萬行이다.

 

순간 순간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모든것 - 

이것이 바로 萬行이다.

 


For someone who pracitces storongly. 

even walkin, eating, drinking tea, meeting friends. 

peeling a ripe persimmon, using the toilet, 

walking through the busy market, 

feeling the sudden autumn wind on one's face, 

watching a passing car on the busy city street-

 

all of these moments are our parctice, 

or 'man haeng.'


 

 

 ▲ 만행, 하버드에서 회계사까지 - 현각 스님

 


2001년 여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검찰청에 일이 있어 잠시 들렸다가 다른 사람들이 볼 일을 보는 동안 시간이 남아 검찰청 뒤 그늘이 있는 낮은 계단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내려 들고갔던 '만행'을 읽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다른 볼일을 보는 사람을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 잠시 꺼냈던 것이고, 

스님이 쓴 책이라서 생각을 많이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에 천천히 조금씩 읽으려 했었는데, 읽다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한번에 책을 다 읽게 되었다.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일도 나에게 이 책을 읽을 시간을 주려했는지, 책을 다 읽고 오후 늦게가 되서야 끝나 오히려 늦은 일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 후로 어떤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가 되면 한번씩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이번이 5번째의 만남이 되었다.

 

 

 

 

책의 내용은 미국인 Paul이 자신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어려서 자신의 가정과 학교, 종교적인 고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 대학에서 숭산스님과의 만남, 젠센터와 불교, 한국으로, 출가,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순서로 진행이 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어쩜 지겨울 정도로 고민하는 生의 가치를 찾는 자신의 고뇌의 답을 찾아 그만의 眞理를 찾아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 마태복음 17장 25~27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 잠보장경 제3:4-436상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그 어느 인간으로서도 한번쯤 고민을 해봤을 명제(命題)이다.

 

하지만 답이 없는 물음에 쉽게 버려진 물음.

 

나 자신보다는 주변인의 시선에 얽힌 삶 속에 점점 희미해져간 자신에 나란 사람을 잊고 삶이란 선택으로 잊혀진 물음.

 

하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누구도 놓지 못할 것이 자신을 찾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왜 사는지, 왜 태어났는지, 이 생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더욱 풀리지 않는 의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왜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가?

 

의미 없는 태어남과 의미 없는 죽음 사이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 역시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 일이 이루어졌다.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줄곧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왜 사는지, 왜 태어났는지, 물건이란 것은 왜 있는지, 이 좁은 지구란 공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어떠한 의미인가, 죽고나면 과연 존재하는것이 있을까...

 

산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가 되어 결국 제자리를 맴도는 형태가 없는 생각은 여러 물음 속에 결국 찾은 것은 없었고, 스스로의 타협으로 작은 뇌의 한 구석에 몰래 숨겨두었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다.

 

- 마태복음 7장 7절, 8절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장26절~28절

  

 

어쩜 나는 패배자가 되어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탈되었지만, Paul은 그 물음을 놓지 않아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참으로 우연하게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모든 것은 그가 갈구하던 진리에 대한 노력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곧고 바른 것을 길(道)이라 하고 두려움 없는 곳을 목적지라 한다. 고요하고 한가한 수레를 타고 진실의 가르침을 덮개로 삼고 부끄러움을 고삐로 삼으며 바른 생각을 재갈로 하여 지혜를 훌륭한 말몰이 삼고 바른 소견을 안내자로 삼는다. 이 세상 어느 사람이라도 이것을 타면 생사의 험한 숲속을 지나 편안하고 즐거운 열반에 도달하리라.

 

- 잡아함경 제22:587경:2-156상, 별역잡아함경 제9:171경:2-437상


 

 

'나는 누구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었다.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존재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학교를 다니며, 격은 내적 갈등 속에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하버드대의 종교학을 공부하며 이상을 찾는 심적 여정을 갖는다.

 

 

 

 

'그래, 진리란 책에 나와 있는 지식이 아니야. 한낱 말의 성찬도 아니야. 진리란 행동이야. 더이상 교과서에서 진리를 외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야.'

 

"우리는 선과 악을 신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선이란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 선이고 없으면 악이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신이 중요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던 특정한 건물이나 성경을 통해 신을 만나느 것이 아니라 신 앞에 인간, 신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진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예수님을 단지 존경하고 섬겨야 할 전지전능한 성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워 내 삶 안에 녹여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보는 것이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러던 Paul은 우연히 한 강의를 접하게 된다.

멀리 동양에서 온 큰 스님 숭산과의 첫 만남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즉 이 '나'라는 것은 생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디서 옵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태어날 때 당신은 어디서 왔으며 죽을 때는 어디로 갑니까?"

 

 

 

나는 강의가 이어지던 두 시간 반 동안 그 강사의 대답을 들으면서 완전히 충격에 휩싸여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누구인가, 어떤 사라인가.......

 

그는 한국에서 온 숭산 큰스님이었다.

 

 

 

"생각할 때 생각할 뿐, 들을 때 들을 뿐, 볼 때 볼 뿐, 먹을 때 먹을 뿐, 그게 다입니다. 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면 생각하지 마세요. 먹을 때 오직 먹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생각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 누가 만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직 '모르는 마음'을 갖고 똑바로 가십시오.


 

  

존재와 나 자신에 대한 물음 속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간결하면서 다시 생각을 묻는 숭산의 방식에 그는 끝없는 망망대해의 끝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았을 지도 모른다.

 

 

 

저의 머릿속에는 지금 결혼을 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삶이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 라는 의문이 가득해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승려의 길을 선택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으며 그런 인연을 가진 것에 대해 아주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작된 선불교와의 만남으로 젠센터의 수행을 알게되고, 다시 큰 스님을 만나게 되고, 한국의 불교를 접하게 되고, 불교와 함께 세계 속으로 그리고 그 자신 속으로 자유로운 여행에 빠지게 된다.

 

속세에 남겨둔 미련을 버리고 하얀 피부의 색목인은 Paul이란 이름을 대신하여 '현각'이란 법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떤 이는 '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버려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신이 있다면 아직 신을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한다면 진정한 내면의 진리는 잃어버린다. 내면의 진리란 모든 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종교란 속박에 잡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찾는 이기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인물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인간의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속으로 가는게 

인생이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삶은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구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 우리 인생의 오고 감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은 게 있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 숭산 스님

 

 

 

저는 바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 현각 스님

 

그리고 책의 제목인 '만행'을 떠난다. 

사람 살이 걷고 걸어 배울 것은 무엇이고, 깨달을 것은 무엇이겠느냐 많은... 

어떤이는 추억에서, 어떤이는 술 한잔에, 어떤이는 사랑 속에... 자기 자신만의 진리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선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 어느 순간 내 마음이 '확'하고 열린 것이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길이 내 앞에 열린 기분이었다. 더이상 잡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이것을 생각 이전의 원점인 생타라고 하는가, ~ 한 시간 명상이 1초처럼 지나갔다.

  

한결 같은 자기 자신을 찾는 길 위에서 노력한 자에게 보여지는 이정표.

 

 

1+2=3과 1+2=0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억지로 인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數)라든지, 색(色)이라든지, 공(空)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개념입니다. 그리고 개념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있기 전엔 너도, 나도, 색도, 공도 없습니다. 생각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진공(眞空) 속에 있는 그대로 있을 따름입니다. 색은 색이요, 공은 공입니다.

  

아직 나는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한 시인의 말 처럼... 아직도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걷고만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찾는 길가의 들꽃은 아름답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마지막으로 현각 스님이 바라본 한국인을 바라보는 인상적인 말과, 다시 한번 떠올리고 싶은 문구로 마치고자 한다.

 

 

 

한국의 절들은 하나같이 고난과 파괴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중건되었다.'

 

'이 절은 몽고군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었다.'

 

이러한 문구들을 읽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두가지다

 

어떻게 다른 민족을 한번도 침략하지 않은 이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외침에 의한 고난에 찬 역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들은 어김없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었다. ~ 바로 그것은 한국인들의 불굴의 정신, 끈기라는 위대한 정신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 현각

 



무소유, 법정


법정스님의 무소유


오래전에 읽었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꺼내 읽었다. 25주년 기념 개정판이라 쓰여 있는데, 초판 발행이 1976년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0년에 인쇄된 것이다. 18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책은 표지의 끝 부분만 조금 구겨졌을 뿐 예전 그대로었다.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말씀하셨거늘, 나는 오랜 시간 이 책을 소유하며 제대로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혼자만의 아이러니에 빠졌다. 




어쩌면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에 더욱 공감이 간 것은 아니었나 한다.


▲ 법정스님 (法頂, 1932.10.8 ~ 2010.3.11)




"아침 우물가에 가면 성급한 낙엽들이 흥건히 누워 있다. 가지 끝에 서성거리는 안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져 버린 것인가. 밤 숲을 스쳐가는 소나기 소리를 잠결에 자주 듣는다."


- 아침에 우물가에 가면 언제나 먼저 차지하는 손님이 있다. 아침 햇살, 별, 안개, 습기, 낙엽... 언제나 존재했던 것을이 게으른 인간의 발걸음 보다 먼저 세상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있던 것이 자연이다. 인간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은 인공으로 변한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나쁜가. 어차피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단지 인공이 늘어나며 멀어지는 소나기 소리 같은 자연이 주는 즐거움이 줄어든 것이 아쉬울 뿐이다.




"나무 아래서 그저 서성거리기만해도,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만 내다보아도 내 핏줄에는 맑디 맑은 수액이 돈다."


- 어려서는 아니 그렇게 아이는 아니고 청소년 때에는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움직이지 못하고 늘 한자리에서 바람이 불어도, 눈 비가 와도,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존재하며, 단지 푸른 하늘로만 향해가고 싶었다. 교정 주변에 유독 많던 커다란 플라타너스는 마치 나의 꿈이 스며든 이상향 같았다. 내 핏줄이 맑디 맑은 수액은 될 수 없을지라도, 지친 몸이 자연으로 돌아가 거름이 된다면 수액을 타고 푸른 잎의 한 구석을 여행해 보고 싶다.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여 일상과 같이 살아야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나, 바쁜 현대사회에 일상적으로 반복하며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먹고 싸는 현실에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책을 읽는 것은 거대한 할애인양 시간을 쪼개야하고, 책 한권을 읽으면 큰 일을 한 것인양 느껴진다. 지구는 늘 같은 속도로 돌고있지만, 성인으로 살아가기에 느껴지는 체감의 시간은 왜이리 가속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무소유' 한 권을 오늘은 읽지 않았는가!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게절인 모양이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 주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 주고 싶다."


- 나는 가을을 싫어한다. 힘 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생의 종착점으로 나를 안내하고, 점차 차가워지는 공기는 내 마음 또한 차가운 거울이 되어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대하게 된다. 지겹게도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 속에 1년이라는 굴레를 돌며 다시 죽음의 기운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호수는 누군가가 던지지도 않은 돌이 날아든 듯 요동친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나에게도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설레이는 계절이 되고 싶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찮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 지금 현재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 그것을 버려라. 생각 속에 집착이 있고 마음 속에 구속이 있다. 얽매이는 것이 없이 놓을 줄 아는 것 그것이 해탈의 첫걸음이 아닐까?




"똑같은 조건 아래서라도 희노애락의 감도가 저마다 다른 걸 보면, 우리들이 겪는 어떤 종류의 고와 낙은 객관적인 대상에보다도 주관적인 인식 여하에 달린 것 같다."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야야 할 인간이다."


- 하늘에 태양이 있고 달이 있듯이, 이승에 천국과 지옥이 있듯이, 인성 속에 착함과 악함이 있듯이, 음양오행의 하나 처럼 세상이 양과 음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똑간은 하루를 보내도 하루는 즐겁고, 다른 하루는 힘들다. 어제 마신 술은 달지만, 오늘 마신 술은 쓰다. 주변에서 주는 상황과 그것에 영향을 받은 마음이 상호작용하여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마음을 변하게 한다. 알고는 있다. 스스로의 마음가짐으로 세상살이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미천하다.




"산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담듬는 물결이다."


-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며 도가 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눈이 많이 내린 아침, 숲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노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굵고 튼튼한 가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처음에는 눈의 무게를 구부러짐이 없이 지탱하고 있었지만, 점차 무거워지는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 것이다. 반면 이보다 가늘고 작은 가지들은 눈이 쌓일 때마다 자연스레 휘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를 본 노자는 깊이 깨달았다. "저 나뭇가지처럼 형태를 구부러뜨림으로써 변화하는 것이 버티고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이치로구나!" 




"인간의 일상 생활은 하나의 반복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스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시들한 잡담과 약간의 호기심과 애매한 태도로써 행동한다.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성의 흐름에 내맡긴 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모방과 상식과 인습의 테두리 안에서 편리하고 무난학 처신을 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지닌 생생한 빛깔은 점점 퇴색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일상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나그네 길을 떠난다.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깊어짐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의한 삶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것이다."

 


- 어찌 어찌 살다보니 나이가 들고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움직이다보니, 내가 나를 살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하루 24시간의 회전으로 지구가 돌 듯, 시간의 흐름을 타고 하루를 반복한다. "나는 누구인가?" 답을 찾기에도 지쳤다. 지금은 그렇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뜬 구름을 헤엄치기라도 하듯, 지금 바로 지금의 나를 만나고 있을 뿐이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 다녀간 것이다. 남들이 보고 탐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남의 것을 훔친 그 과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 남이 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뽐내는 허영심이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앞에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일까. 나에게도 많은 물건이 지금 현재 내 옆에 놓여있다. 우스게 소리로 사람들이 '있다가 없는 것이 돈이다.'라 말이 있는데, 돈이 있다가 없는게 아니라 돈에 대한 마음의 집착이 있다가도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살아 남기 위하여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지만, 생은 사회적 제도의 배우가 아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것을 왜 나는 아직도 모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그는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했다."


- 사소함 속에 감동을 얻는 것은 마음에 큰 여유가 있을때 가능한 것 같다. 바쁜 일상을 보내며 여유를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또한 마음가짐에 달린 것은 아닌가 한다. 여유 또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즐기는 것. 주변에 사소한 수많은 감사함을 배워 마치 생활의 일부가 된 듯 느껴야한다.



 

"아니꼬운 일이 있더라도 내 마음을 내 스스로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아니꼬운 생각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 인생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대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회심, 즉 망므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시켜야 한다."

 

 

- 미원하는 마음이나 싫어하는 마음이나 모든 것이 생각해보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주변에서 주는 영향으로 인하여 자극이 되고 불완전한 심상이 되기는 하나, 결국 받아 들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다. 잔 물결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잔잔해 진다. 언제나 물 아래는 그대로 고여 있다.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그렌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 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소음이다. 사람이 해야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 나가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해진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하는 말이라고 했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주고받는 말은 우리들의 인격 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한다.

꽃가지를 스쳐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하고 죽을 우리인데."

 

- 사회성을 갖은 동물로 말의 위대함 소중함을 느낀다. 말을 잘 하는 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쉴 새 없이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에 저렇게 말도 잘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나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너무 많은 말을 듣게 되어, 머리가 나쁜 나는 과부하가 걸려 모두 잊어버린다. 기억하지 못하는 머리를 애석해야 하는 것인지, 작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 붙는 자에게 그만 부어 달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물건과 인연을 맺는다. 물건 없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것도 물건광의 상관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봄의 흙 냄새를 맡으면 생명의 환희 같은 것이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다. 맨발로 밟는 밭흙의 촉감, 그것은 영원한 모성이다.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문득 살아남은 자임을 의식한다.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

그 꽃은 누굴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래. 숲속의 새들도 자기의 자유스런 마음에서 지저귀고 밤하늘의 별들도 스스로 뿜어지는 자기 빛을 우리 마음에 던질 뿐이란 거야. 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 이미 잉태된 큰 힘의 뜻을 받들어 넘치는 기쁨 속에 피고 지저귀고 빛나는 것이래."

 

- 사람들은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이렇고 하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타인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불완전하고 흠이 많은 미완성의 존재로, 나 보다 못난 것이 없는 타인에 대해 뭐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 같다. 타인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나 자신의 미흡함을 완성시키는 시간이 보람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기준을 잡고 스스로의 자아를 찾아 흔들리지 않는다면, 스스로 나타는 향기가 나에게도 절로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굴 모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일 거다."


- 내 영혼은 보잘 것 없다. 수억명의 숨쉬는 사람들 속에 극히 평범한 하나, 특출날 것이 없고 속세의 일상에 익숙한 영을 잃은 육의 존재이다. 하지만 안다. 누구다 같지는 않다는 것은, 누군가와도 다른 개성은 존재한다는 것을...




"너의 하루하루가 너를 형성한다."


- 오늘 나의 하루는 스님의 말씀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가치에 대한 큰 형성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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