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추모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Historic Site of Yu Gwan-sun



 

유관순 열사 동상

 


유관순 열사 유적, 天安柳寬順烈士遺蹟



천안시 병천면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볼 수 있다. 3.1운동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유관순 열사인데,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와 유관순 열사 유적지가 있고, 만세운동을 벌이던 아우내 장터가 있고, 주변 목천읍에는 독립기념관이 있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


유관순열사 유적지는 유관순열사의 69주기를 맞아 기공식을 갖고, 1990년 4월에 준공되어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관순의 고향 천안시 병천에 1만 5000평 대지 위에 세워진 유관순열사유적에는 추모각(追慕閣)과 영정(影幀), 만세부르는 모습의 동상, 안내판 등이 있다.



만세 부르는 유관순 열사

 

 아우내 삼일운동 독립 사적지

 

유관순 열사 추모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柳寬順烈士記念館


 

유관순 열사 유적지 입구에는 유관순 열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3년 4월 1일 건립한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


건평 542.7㎡, 지상 1층·지하 1층 규모로서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영상실·체험공간·뮤지엄숍 등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 입구


영상실에는 유관순이 출생하였을 때부터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함께 영상물로 꾸며놓았으며, 체험공간에는 유관순 열사가 고문당하던 상황을 체험해볼 수 있는 벽관 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007년 2월 28일에는 석천 윤여환이 그린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을 봉안하였다. 연중무휴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 9시부터 18시, 동절기(11월 ~2월)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열사의 생애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하였고,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학창시설의 유관순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유점선·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는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


추모각에서 본 아우내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추모각 입구


기념관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는 추모각이 나온다.

 

 

유관순 열사 추모각


 

유관순 열사 추모각


추모각은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의 빛난 얼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다. 


추모각과 담장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주위에 담당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으며,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선생이 썼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


유관순 열사 영정,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제78호


추모각에는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다.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 쥔 손을 무릅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루바닥 등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으며, 석천 윤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 되었다.


향로



유관순 열사 추모각 옆에는 순국자 추모각도 있다.

 

 

순국자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은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으로 순국한 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9년에 건립하였다.


 

 

 

유관순열사 유적지, 기념관, 추모지


전화번호 : 041-564-1223

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338-1

관람시간 : 매일 09:00 - 18:00 - 하절기(3월~10월) 연중무휴 / 매일 09:00 - 17:00 - 동절기(11월~2월) 연중무휴






유관순 열사 생가지



어려서 이곳을 들렸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가보니 색다른 기분이 든다. 



이곳에는 단지 이 작은 초가집만 있고 다른 볼거리가 없기에 여행을 하기 위하여 따로 이곳만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에 언제나 사람도 하나 없는 한산한 분위기이다. 천안에 살며 간간히 병천의 순대국밥을 먹으러 들릴 때에 잠깐 들리기는 하는데, 만약 외지에서 여행을 오는 것이라면 유관순 열사 생가지, 유관순 추모관, 병천 순대거리를 한번에 들리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을 같이 본다면 여행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병천순대거리는 유관순 열사가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인 아우네 장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싸리문을 지나면 보이는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生家址)는 작은 초가집으로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한 곳이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사망하였다.

 


유관순 뿐만이 아닌 그녀의 가족과 집안사람들 또한 3·1 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가족 및 집안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훈·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관순 본인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柳愚錫),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柳濟敬), 종조할아버지 유도기(柳道基) 등 8명이다.

 


 

유중권은 1919년 3월 13일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딸 유관순이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고 고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자, 동생 유중무·조인원 등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 명의 장꾼이 모여들었고, 오후 1시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장대에 큰 태극기를 매단 채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조인원, 유중권·이소제 부부, 김상헌, 김주헌, 김교선, 김상철, 조병호, 유관순 등이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일본 헌병 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이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끌고 가는 것을 본 유중권은 부인인 이소제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뒤따르며 필사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의 어머니이자 유중권의 아내인 이소제도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남편 유중권, 딸 유관순과 함께 헌병 주재소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소제는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남편이 죽자 더욱 열렬히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했고, 무도한 일본 경찰이 총을 난사하여 남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은 1919년 4월 1일의 공주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유우석이 자란 동면 지령리 마을은 1900년대 초 전 주민이 감리교로 개종하여 마을 자녀들이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다. 유우석은 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에서 조만형과 함께 공부했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때 유우석은 공주 영명학교 학생으로 공주에 있었기 때문에 병천 만세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같은 날 영명 학교가 중심이 된 공주 읍내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우석은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된 데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재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안창호 등이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에서 모임을 갖고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관회가 영명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고,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등사판으로 밀어 1천 장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때 유우석도 학생 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 동원과 「독립 선언서」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유우석은 노명우(盧明愚)·강윤(姜允)·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의한 뒤, 이튿날 오후 3시경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유우석은 다른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 서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저지로 좌절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났고, 유우석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8월 29일 공주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과 결혼하였으며, 1927년에는 원산 청년회(元山靑年會)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함흥 지방 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광복 후 유우석은 대한 노동 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전국 혁명자 총연맹 중앙 집행 위원, 통일 독립운동자 중앙 협의회 간사, 유도회 청년회 총본부장, 순국선열 유족회장 등을 역임하다 1968년 5월 28일 사망하였다.

 

  

유관순의 작은아버지이며 유중권의 동생인 유중무는 당시 지령리 교회 교사로, 병천 3·1 운동 주도자의 한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지령리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1912년 장남 유경석은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1914년경 딸 유예도를 이화 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세의 나이로 이화 학당 3학년 졸업반이었다. 이화 학당에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던 유예도가 유관순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운동을 벌이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유중권·유중무·조인원 등이 나서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 그리고 형인 유중권, 조카 유관순 등이 병천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는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라 총을 난사하였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중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들쳐 업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헌병들을 압박하며 인명 살상에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중무는 병천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며, 9월 11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의 사촌언니인 유예도는 유중무의 장녀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살의 나이로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다.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 선언문 선포식에 사촌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가하한 뒤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3월 13일에는 유관순과 함께 귀향하여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을 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였다.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선두에 섰던 큰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趙仁元)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아버지 유중무와 유관순 등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피신하여 두안골의 외가로 피신하였다. 수색의 손길이 외가까지 미쳐오자 외삼촌이 진천으로 피신시켰고, 다시 홍성으로 피신하여 광복의 그날까지 숨어 지냈다. 광복 후에는 농촌 계몽 지도원, 반탁 운동 지도 위원, 애국 부인회 지방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오촌조카이며 유중무의 손자인 유제경은 평소에 독립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주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앨범 편찬 위원이 되어 앨범에 일본 연호가 아닌 단군기원을 쓰고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1936년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시험에 제1종으로 합격하여 은산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1년 4월 1일 충남 공주군 장기(長岐) 국민 학교 6학년 담임교사로 있으면서, 천황을 신격화하고 한국인을 황민화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의식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일제의 주목을 받던 유제경은 학생들의 졸업 기념 사진첩에 “땀을 흘려라, 피를 흘려라, 눈물을 흘려라”라는 문구를 써 준 것이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행위라 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5년 2월 5일 고등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형무소 수감 중에 ‘해남도 파견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중국 하이난 섬[海南島]에 끌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귀환하였다.

 

 

 

유관순의 종조할아버지인 유도기는 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인원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서는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조인원·유중권 이소제 부부·유관순·김상헌·김주헌·김상철·김교선 등이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유도기도 몰래 감추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기세를 북돋우며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5월 9일 대전 지방 법원 공주 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렇듯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 및 집안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투쟁을 전개한 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유관순열사 생가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병천면 용두리 3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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