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운주산성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날이 풀리며 운동을 할 겸 낮은 산을 찾아 오르기로 했는데,  첫번째로 가기로 한 산은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운주산이다. 운주산의 높이는 460m 정도로 오르기에 편하다. 


운주산 종합안내도


전동면 미곡리·청송리와 전의면 동교리·신정리 경계 지점에 솟아 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고산사라는 사찰이 있고,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서 고산산성이라고도 하는 운주산성이 있다.


운주산 등산로


운주산성 가는 길


등산로 입구에 있는 고산사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700m정도 10분가량을 오르면 운주산성의 입구에 도착한다.


산에 흔희 보이는 돌탑


작은 계곡물이 흐른다.


산을 오르다 보니 은사시나무가 종종 보인다. 은사시나무는 은수원사시나무라고도 한다. 계곡이나 산기슭 아래에서 잘 자란다. 1950년 미국산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 사이에서 생긴 자연잡종이다. 은백양과 비슷하지만 잎가장자리가 갈라지지 않고 가지가 더 적게 갈라지며 잎의 털이 떨어지기도 한다. 겨울눈은 달걀 모양이고 흰 털이 난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거나 타원형 또는 둥근 모양이며 길이 3∼8cm, 너비 2∼7cm이다. 불규칙한 이 모양의 톱니가 있으며 뒷면에는 흰 솜털이 빽빽이 난다. 잎자루는 길이 1∼5cm로서 납작하다.


은사시 나무


수원사시나무에 비해 잎에 털이 빽빽이 난다. 수원사시나무는 은사시나무에서 갈라진 종류로서 사시나무와 비슷하다.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인공적으로 교배하여 만든 것을 은수원사시나무 또는 현사시나무라고 하지만 은사시나무와 구별하기 어렵다. 관상수·가로수로 많이 심으며 생장력이 강하다. 민간에서는 나무껍질과 잎을 출혈·치통 등에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운주산성 입구


10분 가량 자연 돌계단을 밟고 오르니 운주산성 입구가 보인다. 입구는 복원된 것이기에 새것 같은 느낌이다. 운주산성 입구까지 임도(林道)가 나 있어 차를 타고 운주산성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고 광장 부근에서 정상으로 바로가면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고, 산성을 한바퀴 돌면 1시간 가량이 걸린다.


복원된 주산성


운주산성은 운주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남단 3개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전동면 3개 마을과 전의면 2개 마을에 위치한 대단히 큰 산성으로 길이 3,098m에 달하는 외성과 안쪽에는 543m에 달하는 내성이 있다. 외성과 내성은 모두 돌로 쌓았다. 


운주산성의 서편 무너진 곳


성내 평지 및 구릉에는 크로 작은 대지가 남아있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고려 조선시대의 자기조각,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운주산성의 동편과 건물터


이 산성을 두고 주류성이라 비정하기도 하는데,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운주산성 외에도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 등지가 주류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주산성에서 본 전의면


운주산성처럼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과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 결합된 이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산성 성곽로 걷기


운주산성은 산책 삼아 트래킹을 즐기는 가족여행지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경사를 오르는 등산로와 성벽을 따라 운주산 정상을 오른 후 다시 성벽을 따라 성벽길의 원점인 문지로 돌아오는 코스는 성벽을 따라 걷기도 하면서 숲 속의 오솔길을 걷기도 하는 등 문화유산답사와 가벼운 등산을 즐기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준다.


운주산 긴급신고 위치 스팟


운주산성 입구에 도착하여 왼쪽 산성을 따라 산성을 한바퀴 돌았다. 그 코스로 돌으니 119 긴급신고 위치표시 운주1에서 운주11 지역까지 차례대로 나온다. 산선 입구에서 30분가량을 가니 정상에 있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나온다.


백제의 얼 상징탑


운주산성이 나당연합군과 전쟁을 하던 곳이고, 백제가 망한 이후 부흥 운동을 하던 주류성이 운주산 주변이라는 학설이 있어서 인지, 백제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백제의 얼 상징탑, 건립기


운주산 정상


운주산 정상의 고유문 비석


‘백제의 얼 상징탑’이 세워져 있는 정상에서는 독립기념관, 천안시, 청주시가 바라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아산만까지 보인다. 


운주산 정상에서 바라 본 전경


정상 360도


정상에서의 풍경


천안시 병천면 일대 풍경


운주산에서 바라본 청주 방면


정상에서 오렌지와 군산 영국빵집에서 사왔던 보리만쥬 간식을 가볍게 먹고 산성길 동편으로 향하였다.


간식으로 먹은 보리만쥬


오렌지 먹고 내려가기


아직은 마른 잎


푸른 하늘과 소나무


운주산성 팔각정


팔각정과 하늘


팔각정에서 바라본 전의면




운주산과 운주산성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 산90

연락처 : 044-861-2114








백제 운주산 고산사




세종시 고산사


미세 먼지가 없이 맑은 날이 오랜만이기에 산에 가고 싶어 오랜만에 산으로 향하였다. 

높지 않은 산을 가고 싶어 어려서 갔던 산인 운주산에 갔다. 


고산사


운주산은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낮은 산이다. 해발고도가 460m정도로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천안 공주 조치원, 청주 일대를 볼 수 있다. 

에는 운주산성이 있고, 꼭대기에는 '백제인의 얼'이라는 탑이 있는 곳이다. 백제인의 얼이란 탑이 있듯 운주산은 백제와 연관이 많은 곳이다.


백제 운주산 고산사 일주문


운주산성은 백제군이 나당연합군과 싸우던 곳이다. 또한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주류성이 전의 일대라는 학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운주산 초입에 있는 고산사(高山寺)에도 백제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종루


입구에 가장 먼저보이는 종루의 이름은 백제루(百濟樓)이다. 종루부터 백제를 기리는 모습이 느껴진다. 


백제루


백제루 안에 있는 범종은 백제삼천범종이라 한다. 백제삼천범종은 백제의 의자대왕과 백제 부흥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극락완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조성된 범종이다.


백제루 옆 모습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백제 의자대왕은 왕비와 왕자를 비롯한 일만이천 명의 유민과 함께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갔다. 의자대왕은 나라를 잃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중국 낙양에서 병사하였고, 당나라 조정은 북망산에서 장사를 지내 줬으나 지금 왕릉은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제인들은 주류성에 모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부흥전쟁을 벌여 3년 여의 오랜 시간 동안 투쟁하였으나 내분과 오랜 전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백제삼천범종


그로부터 1,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타국만리에서 쓸쓸히 승하한 의자대왕과, 주류성에서 백제를 재건하려다 끝난 백제 부흥군의 명복을 빌고 극랑왕생을 기원하는 '백제삼천범종'을 조성하여 아미타 부처에게 시납한 것이라고 한다.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


백제루 아래를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가면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가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나당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는 원찰(願刹)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백제극락보전


법당의 현판도 '백제극락보전'이라 되어 있다. 극란전에서는 의자왕과 백제 부흥군, 원병으로 백촌강 전투에 참전한 왜군의 위패도 한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산사는 1966년에 창건된 사찰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운주산이 백제의 부흥군이 최후를 맞았다는 주류성 주변이라는 학설에서 이렇게 백제를 기리는 사찰이 생겨난 것이다.



주류성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서기 660년 7월 18일에 신라(新羅)·당(唐)의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사람들의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점차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복신(福信)이 웅거한 임존성(任存城)과 도침(道琛)이 이끄는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세력이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주류성을 공격하는 나당연합군을 크게 이겼으며, 이러한 기세로 부흥군은 200여성을 회복하였다. 웅진성 공격 실패와 옹산성(甕山城)에서의 패배로 그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나,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공격에 전념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이 돌아와(662년 5월) 부흥운동을 이끌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세력의 지휘부 내에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더욱이 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倭)가 보낸 병사 2만 7천명이 백강(白江)에서 궤멸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백제의 부흥운동은 이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에 비정하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어 위치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세종 운주산 고산사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고산길 92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88-3)

연락처 : 044-862-8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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