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병천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




▲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


충남 천안의 병천지역을 지나가다 우연히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지 옆을 지나게 되었다. 잠시 쉬어가려 한적한 박사의 생가를 한 바퀴 걸어 보았다. 이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도 있는데, 이 지역 주변에 독립운동가의 기운이 서려 있나 보다.


▲ 천안시 병천면 조병옥 생가


병천 시골마을에 있는 이 생가지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유석(維石) 조병옥(1894.5.21~1960.2.15)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 조병옥 박사, Jo Byungok, 趙炳玉


1894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영명중학을 거쳐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다. 졸업 후 상경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에 졸업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다음 동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5년 『조선의 토지제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1925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이루어진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윤치호를 만나기도 했지만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한편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라는 직위로 함께 참여하였고, 보인광업회사라는 광산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경무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그해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의 부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시 1951년 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민주당은 결성되었고, 조병옥이 이에 참여하면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불과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 생가지의 사리문


생가로 들어가는 문은 사리문으로 되어 있다. 사리문 돌담의 바깥 주차장 우측에 조병옥의 생애를 기록한 기념비가 있다.


▲ 기념비


조병옥 생가는 2002년 11월 국가 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지정 번호 20-1-4]. 면적은 1,600㎡으로 크지 않은 공간이다.


▲ 조병옥 박사 생가


독특한 것은 건물이 기와집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95년 4월 20일에 문중의 고증을 받아 다시 초가로 복원한 것이다.


▲ 기와집을 초가집으로 복원


 ‘一’자형 목조초가와 헛간·외양간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이 있으며, 본채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다. 


 ‘一’자형 목조초가  


 측면


 뒷면


▲ 헛간과 외양간


▲ 헛간 청장


▲ 여물통



조병옥 생가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249 (병천면 용두리 261-6)

전화번호 : 041-521-5162






天安 太祖山 公園

천안 태조산 공원




▲ 공원 연못


추운 날씨도 조금은 풀려 태조산 근처 카페 M 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잠깐 산책을 하려고 태조산 공원을 걸었다.

▲ 태조산공원

태조산 공원은 태조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태조산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일으키고, 천안에 관청을 만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태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산이 높지 않아 태조산 공원에서 빠르게 올라 정상의 정자까지 갔다 다시 공원 쪽으로 내려오면 1시간이면 충분한데, 주변에 높은 산이 없기에 천안의 풍경을 보기에는 참 좋은 산이다. 산이 높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운동 겸 산책 겸 태조산을 찾는다.

▲ 태조산 공원 연못

공원으로 들어가는 좌측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오리 몇 마리가 둥둥 떠다니는 곳이다. 봄이 지나면 공원 주변에 버들나무가 멋지게 보이는데, 약간은 쌀쌀한 초봄에 보니 앙상한 가지만이 있어 썰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태조산 공원의 조각들

▲ 공원의 조각

태조산 공원은 1987년에 조성하였으고, 공원의 이름은 태조산이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산의 서쪽 기슭에서 군사들을 양병한 것에서 비롯된 것과 마찬가지로 태조산 공원이다. 

▲ 쌍돼지조각

시민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야영장·물썰매장·인조잔디축구장·체력단련시설·테니스장 등과 야외공연장·전망대·연못·산책로·등산로·주차장 등의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가족, 학교, 직장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더운 날 나무 아래에 가족 단위로 나와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조각공원

조각 공원은 연못 주변과 그 뒤 공간에 만들어져있는데, 띄엄 띄엄 개성있는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6천여㎡의 공간에 다양한 조각 작품 20여 점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 코브라 같은 양귀비를 바친 손


 
군사 장비의 모형 전시


▲ 공원 잔디밭

조각공원을 지나 좀더 태조산 안으로 들어가면 잔디밭에 오래된 군사 기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실외에 전시된 것 만큼은 아니지만 6.25때나 쓰던 것 같은 포와 탱크 전투기가 몇개 전시되어 있다. 

M548 탄약운반 장갑차

M110 8인치 자주포


천안인의 상

天安人의 像

공원의 맨 마지막에는 큰 조형물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천안인의 상'이다. 천안인의 상은 천안 출신 호국 영령과 천안을 빛낸 인물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인데, 1991년 12월 기존 남산 공원의 충혼탑에 모신 위패 319위와 1995년 5월 10일 시·군이 통합된 후 성거읍 천흥리의 충혼탑에 모신 위패 632위를 함께 옮겨 1995년 7월에 천안인의 상 각명비(刻銘碑)에 이름을 새기고 위패는 그 옆에 매장하였다. 상에 각명되는 대상자는 천안시 ‘천안인의 상 관리 조례’에 따르고 있다. 천안인의 국립 묘지령 제3조 안장 대상자, 국가 또는 지방 공무원 연금법 시행령 제2조 대상자, 국가 또는 국제 대회에서 입상한 자, 일반인으로서 천안을 빛내고 시장(市長) 이상의 장(長)이 된 자이다. 각명비에는 군인 960위, 경찰 51위, 군무원 10위, 학생 1위, 애국단 2위, 향토 예비군 1위, 공무원 1위, 기타 8위 등 전체 1,034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상 몸체의 전체 높이는 6m이고, 기둥은 4개로 높이 9m이며, 재질은 청동이다. 각명비는 높이 2.6m, 길이 7.4m이며, 재질은 대리석이다. 명칭비는 높이 1m, 길이 2m이며, 재질은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다. 2002년 11월 30일에는 국가 보훈처로부터 현충 시설물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기도 하다.

 
태조산 공원은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산 아래 있어 나들이로 가기에 좋다. 등산로 입구에 있기에 태조산을 오르며 가볍게 둘러 볼 수 있으나 여행으로 찾아갈 곳은 아니고, 시민들이 산책하러 나갈만 한 곳이다. ^^


천안 태조산 공원

전화번호 : 041-529-5117
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태조산길 261 (유량동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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