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생가지



어려서 이곳을 들렸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가보니 색다른 기분이 든다. 



이곳에는 단지 이 작은 초가집만 있고 다른 볼거리가 없기에 여행을 하기 위하여 따로 이곳만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에 언제나 사람도 하나 없는 한산한 분위기이다. 천안에 살며 간간히 병천의 순대국밥을 먹으러 들릴 때에 잠깐 들리기는 하는데, 만약 외지에서 여행을 오는 것이라면 유관순 열사 생가지, 유관순 추모관, 병천 순대거리를 한번에 들리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을 같이 본다면 여행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병천순대거리는 유관순 열사가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인 아우네 장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싸리문을 지나면 보이는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生家址)는 작은 초가집으로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한 곳이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사망하였다.

 


유관순 뿐만이 아닌 그녀의 가족과 집안사람들 또한 3·1 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가족 및 집안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훈·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관순 본인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柳愚錫),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柳濟敬), 종조할아버지 유도기(柳道基) 등 8명이다.

 


 

유중권은 1919년 3월 13일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딸 유관순이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고 고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자, 동생 유중무·조인원 등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 명의 장꾼이 모여들었고, 오후 1시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장대에 큰 태극기를 매단 채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조인원, 유중권·이소제 부부, 김상헌, 김주헌, 김교선, 김상철, 조병호, 유관순 등이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일본 헌병 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이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끌고 가는 것을 본 유중권은 부인인 이소제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뒤따르며 필사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의 어머니이자 유중권의 아내인 이소제도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남편 유중권, 딸 유관순과 함께 헌병 주재소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소제는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남편이 죽자 더욱 열렬히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했고, 무도한 일본 경찰이 총을 난사하여 남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은 1919년 4월 1일의 공주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유우석이 자란 동면 지령리 마을은 1900년대 초 전 주민이 감리교로 개종하여 마을 자녀들이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다. 유우석은 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에서 조만형과 함께 공부했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때 유우석은 공주 영명학교 학생으로 공주에 있었기 때문에 병천 만세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같은 날 영명 학교가 중심이 된 공주 읍내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우석은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된 데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재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안창호 등이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에서 모임을 갖고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관회가 영명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고,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등사판으로 밀어 1천 장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때 유우석도 학생 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 동원과 「독립 선언서」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유우석은 노명우(盧明愚)·강윤(姜允)·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의한 뒤, 이튿날 오후 3시경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유우석은 다른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 서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저지로 좌절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났고, 유우석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8월 29일 공주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과 결혼하였으며, 1927년에는 원산 청년회(元山靑年會)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함흥 지방 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광복 후 유우석은 대한 노동 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전국 혁명자 총연맹 중앙 집행 위원, 통일 독립운동자 중앙 협의회 간사, 유도회 청년회 총본부장, 순국선열 유족회장 등을 역임하다 1968년 5월 28일 사망하였다.

 

  

유관순의 작은아버지이며 유중권의 동생인 유중무는 당시 지령리 교회 교사로, 병천 3·1 운동 주도자의 한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지령리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1912년 장남 유경석은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1914년경 딸 유예도를 이화 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세의 나이로 이화 학당 3학년 졸업반이었다. 이화 학당에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던 유예도가 유관순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운동을 벌이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유중권·유중무·조인원 등이 나서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 그리고 형인 유중권, 조카 유관순 등이 병천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는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라 총을 난사하였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중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들쳐 업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헌병들을 압박하며 인명 살상에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중무는 병천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며, 9월 11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의 사촌언니인 유예도는 유중무의 장녀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살의 나이로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다.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 선언문 선포식에 사촌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가하한 뒤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3월 13일에는 유관순과 함께 귀향하여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을 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였다.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선두에 섰던 큰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趙仁元)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아버지 유중무와 유관순 등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피신하여 두안골의 외가로 피신하였다. 수색의 손길이 외가까지 미쳐오자 외삼촌이 진천으로 피신시켰고, 다시 홍성으로 피신하여 광복의 그날까지 숨어 지냈다. 광복 후에는 농촌 계몽 지도원, 반탁 운동 지도 위원, 애국 부인회 지방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오촌조카이며 유중무의 손자인 유제경은 평소에 독립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주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앨범 편찬 위원이 되어 앨범에 일본 연호가 아닌 단군기원을 쓰고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1936년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시험에 제1종으로 합격하여 은산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1년 4월 1일 충남 공주군 장기(長岐) 국민 학교 6학년 담임교사로 있으면서, 천황을 신격화하고 한국인을 황민화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의식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일제의 주목을 받던 유제경은 학생들의 졸업 기념 사진첩에 “땀을 흘려라, 피를 흘려라, 눈물을 흘려라”라는 문구를 써 준 것이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행위라 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5년 2월 5일 고등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형무소 수감 중에 ‘해남도 파견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중국 하이난 섬[海南島]에 끌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귀환하였다.

 

 

 

유관순의 종조할아버지인 유도기는 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인원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서는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조인원·유중권 이소제 부부·유관순·김상헌·김주헌·김상철·김교선 등이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유도기도 몰래 감추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기세를 북돋우며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5월 9일 대전 지방 법원 공주 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렇듯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 및 집안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투쟁을 전개한 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유관순열사 생가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병천면 용두리 338-1)








천안 병천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




▲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


충남 천안의 병천지역을 지나가다 우연히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지 옆을 지나게 되었다. 잠시 쉬어가려 한적한 박사의 생가를 한 바퀴 걸어 보았다. 이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도 있는데, 이 지역 주변에 독립운동가의 기운이 서려 있나 보다.


▲ 천안시 병천면 조병옥 생가


병천 시골마을에 있는 이 생가지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유석(維石) 조병옥(1894.5.21~1960.2.15)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 조병옥 박사, Jo Byungok, 趙炳玉


1894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영명중학을 거쳐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다. 졸업 후 상경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에 졸업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다음 동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5년 『조선의 토지제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1925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이루어진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윤치호를 만나기도 했지만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한편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라는 직위로 함께 참여하였고, 보인광업회사라는 광산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경무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그해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의 부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시 1951년 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민주당은 결성되었고, 조병옥이 이에 참여하면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불과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 생가지의 사리문


생가로 들어가는 문은 사리문으로 되어 있다. 사리문 돌담의 바깥 주차장 우측에 조병옥의 생애를 기록한 기념비가 있다.


▲ 기념비


조병옥 생가는 2002년 11월 국가 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지정 번호 20-1-4]. 면적은 1,600㎡으로 크지 않은 공간이다.


▲ 조병옥 박사 생가


독특한 것은 건물이 기와집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95년 4월 20일에 문중의 고증을 받아 다시 초가로 복원한 것이다.


▲ 기와집을 초가집으로 복원


 ‘一’자형 목조초가와 헛간·외양간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이 있으며, 본채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다. 


 ‘一’자형 목조초가  


 측면


 뒷면


▲ 헛간과 외양간


▲ 헛간 청장


▲ 여물통



조병옥 생가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249 (병천면 용두리 261-6)

전화번호 : 041-521-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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