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기차에서


2003年, 중국 베이징 서역에서 서안으로 가는 기차


여행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일과 생각하지 못한 추억도 생겨난다. 중국여행을 하며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달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중국의 기차를 타본 것은 2003년 노동절 기간에 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있는 연길에서 친구가 사는 길림시에 가기위해 잉워를 타본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중국의 기차는 '루완워'라는 4인실 침대칸과 '잉워'라는 6인 3층 침대가 나열되어 있는 종류의 침대칸이 있고, '잉쭤'라는 좀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칸이 있었다. 


처음 탄 기차는 잉워를 타고 8시간 정도를 달린 것인데, 밤에 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렸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다며, 한국에는 없는 침대칸 기차를 타는 것이 신기했다. 기차를 타니 그 칸을 담당하는 역무원이 와서 표를 달라고 한다. 왜 표를 달라고 하는지 모르고, 그냥 확인차원에서 달라고 하는가 보다 하며, 표를 주니, 표는 가져가고 금속으로된 표로 바꿔주었다. 나중에 내릴 때 알게 된 것인데, 오랜 시간을 가다보니, 자는 사람도 있고 해서 내리는 시간에 다시와 그 금속으로 된 것을 다시 가져다 주며 깨워주기도 하고, 다음 역이 내리는 곳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상당히 좋았다. 친구들끼리 수다도 떨며 잠이 들고 다음날 새벽에 길림에 도착하여 처음의 기차 여행을 마쳤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탔던 기차는 여름에 연길에서 북경에 가는 기차를 타고 20시간 정도를 갔다. 그때에도 잉워를 타고 갔는데, 잠자기 전에 보았던, 옥수수 밭의 풍경이 자고 일어나도 똑같은 옥수수 밭이기에 도대체 얼마나 옥수수를 키우는 곳이 넓은지 의아해 했다. 거의 대부분 잉워를 타고 이동을 했던 것 같다. 기차 안에는 생각보다 외국인이 없었다. 외국인인 저에게 여행 중이냐며 말을 붙이는 사람도 있고, 기차 안의 중국사람과 함께 음식도 먹고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데 북경의 서역에서 장안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바로 옆 침대에 외국인 배낭여행객이 있었는데, 여자의 키가 너무 커서 침대 밖으로 하얀 발이 뛰어나온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하얀 발의 발바닥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 새까만 것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크게 웃지는 못하고 작게 큭큭 거리던 것이 기억이 난다. 


북경의 서역은 2003년 서안에 갈 때와 2004년 낙양에 갈 때 두번 이용을 해보았는데, 북경역보다 세련되고 좋았다. 북경과 낙양은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8시간 정도는 간 것 같다. 중국의 기차를 탈 때마다 장기간을 움직이다보니, 기차에 타기 전에 먹을 것을 잔득 사서, 들어가곤 한다. 기차 안에서 음식 카트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잠시 멈추는 역의 플랫폼에 라면이나 밥과 도시락 같은 것을 팔고 있기는 한데, 플랫폼에서 파는 것은 멀리에 있으면, 기차가 출발해버릴까봐 조마조마 하며 빨리 달려가 음식을 사오기도 했다. 식사로는 라면과 도시락 그리고 미리 사가지고 온 버거를 먹거나 했다. 음식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해도 하루 정도를 기차 안에 있으면, 상당히 지루하기는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빨리 시간이 지나간다. 한국에서는 3시간 정도만 기차를 타고 가도 너무 지루하고 시간이 왜 이리 가지 않는가 하며 답답한 마음도 많았는데, 중국에서 기차를 차며 내리기 5시간 정도가 되었을 때에 내릴 때가 다되었다며, 짐을 정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었던 때도 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타본 것은 계림과 장안을 이동할 때 걸린 28시간 이었다. 밤 11시에 기차를 타고 하루를 기차에서 보낸 후 다음날 새벽 1시에 기차에서 내렸다. 하도 오래 가다보니, 밤에 잘때에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쪽으로 달리던 것이, 아침에 눈을 뜨니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고 일어나니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며 혼자 마음을 쓸어 내렸다. 그렇게 놀라며 갔던 계림에서는 새벽에 비가 부슬부슬 내려와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갑자기 쓸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즐거움이 더한 시간이었다. 


그런 즐거움은 기차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쑤저우에서 청도로 가는 기차에서는 귀여운 꼬마아이와 친해져 함께 놀기도 하고, 한 번은 역무원과 친해져 함께 사진도 찍고 그랬다. 그 역무원은 처음에 중국말을 못하는 줄알고 있었는데, 통로를 청소하며 오던 역무원이 책을 읽고 있던 제 근처까지 오기에 쓰레기가 없다고 말을 하니, 10시간 정도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중국말을 해서인지, "뭐야~ 중국말을 할 줄 알잖아~" 하며 꿍얼거리며 가기도 했다. 그 역무원은 다른 칸에도 한국인이 있다며, 갑자기 그 한국분을 소개시켜주어 내려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잉워를 타고 다니며 있던 일들이었는데, 잉워 말고도 루완워와 잉쭤도 모두 타보았다. 루완워는 상당히 아늑하고 좋은 4인실 침대칸이다. 누을 수 있는 공간도 넓은 편이고, 조용하고 더 깨끗해서 좋았다. 그리고 다른 독특한 기차로는 항주에서 상해로 가는 기차는 약간 빠른 의자칸 기차였는데, 기차가 2층이었다. 2층 버스는 타본 적이 있는데, 2층 기차는 처음 타보아서 신기했다. 중국의 가장 발전된 도시인 상하이로 가는 기차라 그런지 상당히 깨끗한 기차였다. 


가장 타기 힘튼 기차는 바로 잉쭤라는 자리이다. 잉쭤는 한국의 예전 통일호를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습다. 약간은 딱딱한 의자칸인데, 그런 기차칸을 타고 톈진에서 연길까지 18시간 정도를 타고 갔다. 잉쭤를 탄 것은 다른 표를 구할 수가 없어서 타게 되긴 했지만, 그때의 동행과 나중에 창가쪽 자리를 바꿔가며 앉아가기로 하고 탔었다. 심양까지가면 자리를 바꾸기로 했는데, 끝까지 바꿔주지 않는 친한 형님을 보며 구박을 했다. 잉쭤의 자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말고도 입석처럼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그 수가 많다. 의자 밑에 누워서 가는 사람도 있고, 내 다리 바로 앞에 쪼그려 앉은 사람도 있어서 다리를 10시간 정도 펴지도 못하고 갔다. 화장실을 쓰는 사람도 많아 한참을 기다려 들어가기도 했다. 연길로 가는 기차이다보니, 조선족들이 기차안에 있어 말이 편하게 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두산을 여행하려고 기차에 탄 한국인 여자 두 분도 같은 칸에 있어서 이야기도 하고 했다.


이런 저런 중국의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지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북한의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톈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 있는 분이 뭐라고 말을 건다. 중국어도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못 알아들었다. 중국에 있은 지 오래 되어서 한국말과 비슷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못 알아 들었던 것이었다. 다시 잘 들어보니 한국말이기는 한데, 좀 억양이 이상했다.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해주고, 기차를 탔더니, 그 할아버지도 같은 기차칸에 계셨다. 역에서 대화를 한번 해서인지, 말을 먼저 붙여오셨다.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명태를 팔기위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국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왕래를 하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찰라에 할아버지께서 내게 물어본다. 한국에서는 '아버지'를 뭐라고 부르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한국에서도 '아버지'라고 합니다." 라고 답을 했더니 또 물어보신다. 그럼 한국에서는 '친구'를 뭐라 부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국에서도 친구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며, 옆에 앉아있는 중국사람에게 중국말로 이야기를 한다. 자기가 쓰는 말과 한국에서 쓰는 말이 같다며 중국인에게 말을 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어떤 의미의 웃음이었는지, 알듯 모르듯 묘한 감정이 제게도 찾아왔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니, 한국의 분단 상황이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을 벗어나, 정치와 권력인 소수를 위한 분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분단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남한과 북한의 대립관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전에도 통일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말을 쓰며 수 천년을 함께 보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 반백년이 조금 넘은 우리 민족에게 이별은 긴 시간만은 아닌 것 같다. 기차를 타고 간도 지역으로 향하며, 언젠가 삶이 끝나기 전에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이 대륙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기약했다. 


과연 그런 날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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