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내소사, 來蘇寺




봄이 오는 내소사


3월 중순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봄이 아닌 늦겨울 같다는 생각이 마음에 남아있었지만 내소사에 피어나려는 산수유 나무를 보니 나도 모른 사이에 봄은 주변을 찾아왔다.


내소사 입구


부안에 들려 예전부터 들어본 유명한 사찰인 내소사를 찾았다. 내소사로 향하며 보이는 산새가 그림 같았다. 하지만 사찰 앞에 도착하자 번잡해 보이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로 어지럽다. 유명한 사찰이다보니 절을 관광오는 사람이 많아 자연스레 관광지 분위기이다. 마음의 안정을 갖을 사찰의 입구가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내소사로 향하는 삼문(三門)



식당가 거리가 끝나는 곳이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이 나온다. 관광지의 분위기를 단숨에 사찰의 분위기로 바꾸는 것이 사찰의 일주문이 아닌가 한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산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一柱門)


사찰의 입구에는 사찰을 담아준 산의 명칭이 함께 담겨있다. 내소사는 부안 내소사라 부르며 능가산 내소사라고도 많이 부른다. 일주문의 모양은 사찰마다 다른데 내소사에는 그림이 그려있지 않고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불교에서는 용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내소사의 일주문 대웅전 등에 있다.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묘사된다. 용이 불교에 받아들여 질 때의 본래의 모습대로,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부처의 주변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찰 입구에 있는 무지개다리 아래쪽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아, 개천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가 청정한 공간인 절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절의 일주문 천장에 조각된 용머리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법당 안의 기둥이나 벽에 그려진 용은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여 법당을 신성한 공간으로 만드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용이다. 또 불상 장식인 닫집에 조각된 용은 불법 수호의 의미와 함께, 왕의 최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부처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일주문의 여의주를 문 용 두마리


이에 비해 법당 정면의 기둥 위에 조각된 용은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저 언덕, 즉 피안 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탈것을 주로 배에 비유하였다. 그 배는 주로 용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를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즉 반야용선은 번뇌에 쌓인 이 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건너갈 때 타는 상상의 배인 셈이다. 법당은 바로 부처와 함께 극락세계로 가는 배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법당 앞쪽의 기둥머리나 계단의 소맷돌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법당이 곧 반야용선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즉 용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매표소가 있고, 유명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


사천왕문은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내소사의 사천완문은 17평의 목조 한와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오도송은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를 이르는 말. 게송(偈頌)의 하나이다.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본래 게와 송은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날은 목조 사천왕상 조성 불사 중이기에 내소사의 사천왕을 만자니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천왕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내소사가 보인다. 그리고 세번째 문이자 마지막 문인 봉래루가 나온다.


봉래루(蓬萊樓)


내소사 봉래루는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다. 이들 초석의 배치는 전면 5칸 12.23m로 각 기둥 사이가 215-244-305-244-215cm로 중앙의 칸으로 갈수록 넒어지고 있다. 측면은 외열 기둥 사이가 3칸으로 6.20m이며 각 기둥 사이는 215-190-215cm의 간격으로되어 있지만 내부는 2칸으로 각 칸이 310cm를 유지하고 있다.


봉래루 뒷편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봉래루 옆면


속설에는 “봉래루는 실상사의 누각으로 1415년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 하였으나 6.25전까지 분명 사찰이 존재하였는데 하필이면 다른 사찰의 누각을 내소사로 옮겨올 수도 없거니와 분명 문헌에서 증명하는 바이니 재론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봉래루에 오르면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시주질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봉래루 앞 연등


내소사 누각 배치도



관음봉 아래 내소사



봉래루 뒤로 들어가면 병풍같은 관음봉이 보이고, 내소사의 전경이 보인다. 관음봉의 높이는 433m로 높지는 않다. 전라북도 부안군의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있다. 내소사에서 관음봉을 지나 직소폭포와 저수지를 거쳐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이 국립공원의 한 축을 이룬다. 바위를 깎아세운 듯이 내소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일주문에서 시작해서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년(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


관음봉과 대웅전  [觀音峰] 


관음봉 서쪽으로는 망포대(望浦臺)와 신선암(神仙岩) 줄기가, 동쪽은 옥녀봉 줄기가 곰소만을 에워싸고 뻗어 있다. 주변 옥녀봉(432m)과 선계폭포, 선계암, 굴바위는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선계폭포가 있는 우반계곡은 허균이 한때 은거하여 홍길동전을 집필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관음봉 바로 아래 능선에 올라서면 남으로 곰소만이 호수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멀리 작은 해협 건너 고창군 일대와 선운산도립공원의 산들이 펼쳐진다.


조사전과 관음봉


내소사는 임진왜란때 절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조선인조11년(1633)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비롯 설선당 등을 중건 중수 하였다. 그 후 광무 6년(1902) 관해선사와 만허선사의 원력으로 증축불사가 있었으며, 전등회 조실이신 해안 선사의 참선지도로 인하여 수많은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정진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내소사를 있게한 우암 혜산 선사가 1983년 내소사에 주석하면서 다시 한 번 쇠락해진 전각 및 요사를 정비, 복원하여 오늘날의 내소사를 이루게 되었다.



내소사 느티나무



내소사 전경


내소사로 들어가니 정면으로 큰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약 천년을 살았고 나무 둘레가 8m 정도가 된다.


내소사 느티나무


거대한 느티나무가 마치 절을 수호하는 장군처럼 앞에 버티고 있다.


소원을 담은 기와



내소사의 범종



느티나무 양쪽 옆으로는 종이 있다. 왼편에는 고려 동종이 있는 보현각이 있고, 오른편에는 범종각이 있다.


보종각


보종각는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현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보종각에 있는 고려동종은 원래 내변산에 있는 청림사에서 고려 고종 9년(1222)에 만든 것이다.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겼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종으로, 높이는 1.03m, 직경은 67m, 무게 420kg 이다. 종을 매 다는 고리에 용을 새겼고, 종 가운데에 세 분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가운데 본조물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협시상은 서 있는 모습이다. 종의 윗 부분와 아랫부분에는 화려한 식물 문양을 새겼으며, 해바라기처럼 뾰족한 끝을 가진 연꽃 무늬가 종을 때리는 자리이다. 표면의 묘사수법이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 범종의 특징이 드러나있는 종이다.


범종각


범종각은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무설당



보현각 뒤편으로는 무설당이 있다. 


무설당


무설당 (無說堂)은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내소사 삼층석탑과 대웅보전



내소사의 중앙에는 대웅전과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내소사 3층석탑은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습니다. 하층기단은 전고 3.46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다. 이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되었습니다.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하였다.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을 각출하였습니다.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배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다.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三層石塔)



삼층석탑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내소사의 중심인 대웅전이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大雄殿)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대웅전 현판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 문살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꽃살은 나뭇결이 그대로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더욱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꽃문살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꽃 한잎 한잎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며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정갈하게 비쳐든다.



설선당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설선당이 있다.


설선당(說禪堂)


설선당은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다.


설선당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지장전과 지옥벽화, 명부10왕



대웅전의 왼편에는 지장전이 있다.


내소사 지장전 [地藏殿]


지장전은 21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명부10왕을 봉안한 전각으로 2010년에 건립하였다. 지장전(地藏殿)은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전의 둘레에는 제10지옥의 벽화가 그려있다. 요즘 인기있던 영화인 '신과 함께'에서 나온 지옥의 대왕의 모티브가 된 불교의 지옥왕을 볼 수 있다. 지옥과 이를 관장하는 대왕은 경전마다 다르다고 한다.


진광대왕


진광대왕은 죽은 자가 7일째 방문하는 명부의 판관으로, 생전의 선행을 사경대 (邪鏡臺) 로 조사하며 다른 왕에게 보내 심판과 벌을 받게 한다. 직접 벌을 주지는 않고 주심판관으로 생사나 수명을 관장한다.


초강대왕


초강대왕은 죽은 자가 14일째에 방문하는 명부의 판관으로 부정직한 중매, 사기 판매, 사람이나 동물을 해쳐 불구로 만든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송제대왕


송제대왕은 죽은 자가 21 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부정한 관리로서 속이거나 이익을 챙기고 배신,사람을 죽였거나 ,중상모략으로 남을 곤경에 빠트리게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오관대왕


오관대왕은 죽은 자가 28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베풀지 않았거나, 병든 환자를 속이고, 사기 판매 , 저울 눈금을 속인 상인 , 신 에 대한 불경, 사원에서의 도둑질을 한 자를 벌을 주는 판관이다.


염라대


염라대왕은 죽은 자가 35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악법을 따르고 ,함부로 살생을 하고,도둑질, 음행을 일삼고, 살인 , 도를 구하는 자를 죽인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평등대왕


평등 대왕은 죽은 자가 100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부모나 윗사람에게 효성이 부족한 자, 도둑질,사람을 죽인 자, 사음을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태산대왕


태산대왕은 죽은 자가 49일째 방문하는 판관으로 무덤을 파 헤쳐서 사람의 살을 먹거나 의료 목적에 이용, 인신매매로 사람을 팔고 사는 행위를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도시대왕


도시대왕은 죽은자가 1년이 지난 뒤 방문하는 판관으로 방화범, 낙태시술자,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글, 작품을 감상하고 읽은 사람, 이유 없이 자살을 한 자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판관이다.


오도전륜대왕


오도전륜대왕은 죽은 이의 죄를 심판하는 저승시왕 중 10번 째 왕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다스리고 생전의 행동을 심판하여 상벌을 주는 지옥의 열번째 왕이다. 죽은 넋이 3년째 되는 날에 오도전륜대왕에게 열 번째이자 마지막 심판을 받고 생전의 행위에 따라 다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진화사와 삼성각



지장전 뒤편으로는 진화사와 삼성각이 있다.


진화사 (眞華舍)


진화사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각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다.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다 삼성각의 현판은 구당의 글씨이다.



내소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나무에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보니 마치 오도전륜대왕으로 부터 환생을 받아 피어나는 생명 같이 느껴졌다.



부안 내소사


입장료 : 성인 3000원

주  소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전화번호 : 063-583-7281

홈페이지 : http://www.naesos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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